제주 43 기행을 마치고
제주의 바다는 유난히 푸르렀고, 월령리의 선인장은 강인한 생명력으로 붉은빛을 내뿜고 있었다. 하지만 겨울 칼바람에 몰아치는 포구의 파도는 이곳이 한때 비명과 통곡으로 가득했던 땅이었음을 잊지 말라고 울부짖는 듯했다.
낮은 돌담 너머 자리 잡은 고(故) 진아영 할머니의 집 앞, ‘91 삶이 19 앎으로’라는 글귀가 발길을 붙잡았다. 1949년, 영문도 모른 채 날아든 총탄 한 발은 할머니의 평생을 무명천 속에 가두었다. 평생 제대로 먹지도, 말하지도 못한 채 침묵으로 일관해야 했던 그 모진 세월이 작은 돌담집 구석구석에 배어 있었다. 할머니의 빈 집은 우리에게 묻는다. 진정한 평화란 무엇이며, 우리는 무엇을 기억하며 살아가야 하는가.
독서모임에서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고 시작된 이 여정은 제주인의 공론장이자 처형장이었던 관덕정에서 시작되었다. 유난히 눈이 맑고 순했던 해설사님의 설명을 들으며 제주의 모든 비극과 희망이 시작된 그곳의 무게를 느꼈다.
이어진 너븐숭이 기념관과 북촌마을, 현기영의 『순이삼촌』 비석 곁에는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아이들이 돌 아래 잠들어 있었다. 400여 명의 주민이 학살된 북촌리의 한 곳에서, 임시로 묻힌 채 70여 년을 견뎌온 아이들의 무덤은 4·3이 여전히 우리 역사에서 제 이름을 찾지 못하고 허우적거리고 있음을 보여주는 듯했다.
유족의 눈물로 쌓은 낙선동 성터의 좁은 성벽 안, 250여 명이 수용소 같은 삶을 6년이나 견뎠던 곳, 우리는 그곳에서 직접 살았던 50대 여성의 고백을 들었다. 아무 말 못 하고 그저 돌담을 만지며 꺼이꺼이 울 수밖에 없었던 어머니 이야기를 비롯하여 눈물 없이는 할 수도, 들을 수도 없는 삶의 이야기였다.
뿐만 아니라 4·3의 역사를 파헤치는 것이 목숨을 거는 일이었던 시절, 논문 제목조차 숨겨야 했고 논문 심사 발표 때조차 제지를 당해야 했던 내막을 해설사님께 전해 들으며 유족들이 살아온 인생 자체가 ‘인간성의 승리’였음을 깨달았다. 어머니의 침묵과 아들의 추적, 그 간극 속에 흐르는 눈물은 성터의 이끼보다 더 짙게 배어 있었다. 그들은 단지 불행한 일을 겪은 분들이 아니라 진정 후세에게 존경받을 만한 분들이시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 무거운 마음을 안고 발길을 옮긴 다랑쉬굴 앞에는 누군가 두고 간 작은 꽃 한 송이가 따뜻하게 피어 있었다. 1948년, 군경의 토벌을 피해 굴속에 숨어들었던 주민들이 입구가 봉쇄된 채 연기에 질식해 가야 했던 그 처참한 진실 앞에 선 나는 아직도 이 모든 것이 믿기지 않았다. 이토록 아름다운 제주의 유적지 대부분에 제주 사람들의 피와 뼈가 묻혀 있다는 사실이, 무참한 살육의 현장이었다는 사실이 끔찍하도록 아팠다. 어떻게 사람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당시 사라진 마을만 300여 개에 달하고, 100개가 넘는 성을 쌓아 그 속에서 수감자처럼 살아야 했던 기록들을 보며 세상에 일어나지 못할 비극은 없음을 실감했다. 그렇기에 그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더욱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우리 모두가 하나의 덩어리로 연결된 공동체라는 사실을, 그 연결의 끈을 놓치는 순간 우리가 얼마나 잔인하게 변할 수 있는지를 다랑쉬굴의 어둠은 묵직하게 경고하고 있었다.
아직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진실이 많은 제주의 4·3은, 이름이 정해지지 않은 ‘백비(빈 비석)’로 우리 앞에 누워 있다. 그 비석에 이름이 명백히 새겨질 때까지 우리는 멈추지 않고 기억해야 한다. 소설『작별하지 않는다』가 전하는 메시지처럼, 우리가 사랑과 작별하지 않겠다는 의지, 그리고 우리 안의 양심과 끝내 작별하지 않으리라는 선언을 가슴에 담고 다음 여정으로 향했다.
우리는 예비검속자 청년들이 총살당한 섯알오름 학살터와 백조일손묘역으로 발길을 이었다. 서로 다른 132명의 조상이 한날한시, 한 곳에서 죽어 그 뼈가 엉겨 붙어 하나가 되었기에 이제는 모두가 한 자손이라는 ‘백조일손(百祖一孫)’. 억울하게 죽어간 이들이 죽어서야 비로소 하나의 가족이 되어야 했던 그 처절한 연대는, 이 아픈 역사를 잊지 않아야 한다는 마음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 주었다. 제주는 4·3뿐만 아니라 역사의 칼바람 속에서 이토록 깊은 고통을 온몸으로 받아낸 선구자적 땅이었다.
일본이 제주를 전쟁 기지로 삼았던 비극의 장소에서, 얼마나 많은 청년이 무참히 쓰러져갔는지 눈앞의 풍경은 아프게 말해주고 있었다. 그날 학살의 현장인 유골터에서는 유난히 거세고 추웠던 칼바람에 갈대들이 거의 땅바닥에 몸을 붙인 채 흔들리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뿌리째 뽑아낼 듯한 바람이었으나, 그들은 서로의 줄기를 엮어낸 채 끝내 꺾이지 않고 버텨내고 있었다. 그날의 아픈 외침이 갈대들의 간절한 몸부림으로 들려오는 듯했다. 조상은 달라도 죽음으로 맺어진 이 처절한 연대를 기억하며, 다시는 이 땅에 사랑과 양심으로부터 작별하는 비극이 반복되지 않기를 기도하며 발길을 옮겼다.
아픈 마음을 안고 마지막 기행지인 4·3 평화공원에서 여정을 마무리했다. 이토록 아름다운 제주에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슬픔이 서려 있다는 것을 그 누가 다 헤아릴 수 있을까.
그러나 그 극한의 혼란 속에서도 인간성과 양심을 끝까지 지켜낸 이들이 있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따뜻한 희망이 되어주었다. 평화기념관 2층에 기록된 양심가들의 이름과 얼굴, 그들의 행적을 마주하며 나는 비로소 안도했다. 그들의 용기에 감사하며, 우리 역사의 아픈 영혼들이 이제는 치유되고 회복되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할머니가 없는 빈터에는 시리도록 해맑은 그리움만이 따스한 햇살로 고여 있었다. 오랜 세월 할머니의 턱을 감싸던 무명천을 벗은 지 20여 년이 지났지만 할머니는 아직도 저 푸른 하늘에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계실 것이다. 세상이 아무리 힘겨운 칼바람으로 몰아쳐오더라도 사랑과 양심의 그 끈을 놓치지 말고 깨어 있으라고 나직이 속삭이면서. 긴 세월의 흐름 속에서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그 혼란 속에서도 본래의 따뜻한 인간성을 지키는 길이 무엇인지 할머니의 빈터는 온몸으로 보여주시고 있는 듯하다.
월령포구의 몰아치는 파도 속에서도 여전히, 시리도록 맑게 빛나는 청옥색 바다, 몰아치는 칼바람에도 서로의 어깨를 맞대고 굳건히 서 있는 돌담길과 그 돌담 위에서 거침없는 바람에 흔들리면서도 끝끝내 살아 꿈틀거리는 백년초가 되어 할머니는 우리가 가야 할 길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ps. 이번 기행을 기꺼이 안내해 주신 강순문 해설사님과 이 뜻있는 기행을 기획하고 준비하며 함께 해주신 그래 독서모임 회원분들께 감사하다는 말씀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