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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온 Jul 14. 2022

Prologue 01-글 똥누기

01. 왜 글을 쓰는가.

몇십 년 전,

중학교 3학년 여름 오후 수학 시간으로 기억된다.

당시 수학을 맡았던 이종우 선생님은 입체도형을 설명하면서 사람은 어느 것에 속하는가를 질문했다.


원기둥? 구?

웅성 되던 아이들의 대답이 잠시 사그라들자

선생님은 도넛형이라고 했다.

엥? 사람의 몸과 너무 다른 모양의 입체도형이라 아이들이 멍해있던 찰나,

뭔가가 들어가면 어떤 형태로든 나와야 하니까.라고 설명했다.

순간 내 머릿속에는 입체도형의 생김새뿐만 아니라 형태의 특징이 확 이해되었다.


맞다, 사람의 몸은 도넛형이다.

들어가면 나와야 한다.

들어가지 않거나 나오지 못하면...

더 이상 살아갈 수 없다.


그런데 비단 몸만 그럴까? 마음도 마찬가지다.

항상 채워지도록 뭔가가 들어가야 하고,

어떤 형태로든 나와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하듯

나도 주로 사람을 만나 교감하고, 영화를 보고,

음악을 듣고 가끔 책을 읽었다.

그렇게 마음을 채웠다.

그리고, 채워지면 대화를 하거나 가끔 아주 가끔 

일기를 썼다.

그런데 어느 순간, 뭔가를 쓰고 싶다는 욕망이 

강하게 올라왔다.

 욕망은   진해지더니 지난봄부터 나를 

못살게 굴었다.


그래서 뭘? 뭘 쓸건대? 뭘 쓸 수 있는데?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정말 문학에는 문외한인지라 학교에서 배웠던 장르 몇 가지만 주워 삼켰다.

소설? 시? 희곡? 수필? 논설문이나 설명문?


그 어느 것도 아닌 것 같았다.

소설을 쓰기엔 상상력이 정말 미천하고,

시를 쓰기엔 감성이 너무도 비루하다.

희곡은 읽어본 적도 없으니 패스.

수필은 직설적인 내가 쓰기에 마땅찮다.

논설문이나 설명문은 밥벌이로 써야 하는 보고서를 쓰면서 일찌감치 질린 장르다.


고심하다 일단 쓰자.

쓰고 싶은 걸 쓰자.

연습한다고 생각하고 쓰자.

그러다 보면 갈래가 보이겠지.

갈등하던 마음을 접고 그냥 무작정 쓰기로 했다.


그런데 왜? 왜 써야 하는데?

라는 질문이 다시 치고 올라왔다.

학교 다닐  당시 숱하게 벌어졌던 백일장에서 

  번의 입선조차    없었다.

그리고 사춘기  뛰어난 감수성으로 문학을 

섭렵하던 소위 문학소녀도 아니었다.

성장하면서   번도 글쓰기에 두각을 나타낸 

적이 없었다.


아, 단 한 번 있구나.

고등학교 1학년  아무도 참여하지 않았던 교내 

독후감 대회에 우리  몫으로 국어 자습 위원이었던 내가 독후감을 내야 해서 울며 겨자 먹기로  

독후감이 1등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독후감을  써서가 아니라 

다른 아이들이 읽지 않는 책의 후광 때문이었던  같다. 독후감을  책이 바로  자크 루소의 '고백록'이었다.

안타깝게도 읽을  고생했을 텐데 무척 길고 

지루했다는  밖에는 남아있지 않다.


어쨌거나  써야 하는가에 대한 스스로의 질문에 나는 어떤 대답도 명쾌하게 하지 못한  작법과 

관련한 책을 보거나 유튜브를 보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얼마 전 나는, 많이 찼구나 싶었다.


부정적인 것이든, 긍정적인 것이든 50 평생을 

살아오다 보니 많이 채웠다.

이젠 그것을 적당히 내보내야 하는 때가 온 것이다.


이제까지처럼 사람을 만나 대화를 나누거나 가끔 

일기를 쓰는 것으로는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감당이 되지 않는 때가 왔다.

왜냐하면 사람과 대화를 나누려면 아무리 유목민식으로 주제가 옮겨 다닌다 해도

상대방과 일정한 주제를 두고 이야기를 해야 한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생각나는 대로 내 논리에 따라 전개할 수 없다.

또 일기는 독백 같아서 쓰고 나면 시원함은 있지만, 자극이 없다.

그래서 이제 남들이 보는 자리에 전을 펴고 뭐든 써보기로 했다.


글밥을 먹고, 글 똥을 누는 것.

그것을 지금 나는 해보려고 한다.


모든 것은 때가 있는 것 같다.

한때 남편과 나의 시간과 공간을 거의 다 차지했던 아이들이 커서 집을 떠났다.

덕분에 서재라는 나만의 공간도 생겼고, 나를 

돌아볼  있는 시간도 생겼다.

이젠 새로운 놀이를 시작할 때인 것이다.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쓰고 싶은 대로 써보겠다.

공감할 누군가가 생기면 기쁠 것이다.

그러나 없다고 해도 어쩔 수 없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나이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아닐 가능성이 농후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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