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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온 Apr 28. 2023

은근한 수업 전편


오늘은 2-3 정규 수업 후,

5교시와 점심시간 보결 수업이 있다.

엊그제 교무부장이 너무너무 미안해하며

보결을 배정했다고 알려왔고,

어제는 2-3 담임교사가 와서 역시

너무너무 미안해하며

수학 연습문제 학습지를 출력해 뒀으니

좀 부탁한다고 했다.


아마 두 분 다 지난주와 지지난 주

여러 번 보결 수업을 맡아 했던 내 상황과,

도심에서 멀어 기간제 교사가 잘 구해지지 않고,

우리 학교가 커서 구성원들의 유고가 많이 생기는 상황에 대한 미안함이 겹쳤던 것이리라.

정작 수석교사인 나는

너무너무 바빠서 돌아버릴 것 같지만 않으면

 대부분 보결시간엔 새로운 아이들과

뭘 하며 놀까 생각하며 즐거워진다.



수석교사로 10년간 대부분

나는 저학년 슬기로운 생활과를 수업해 왔다.

슬기로운 생활과는 1, 2학년에 편성된 교과로

3학년부터 사회와 과학으로 분화되는 통합교과다.

교육과정 성취기준에 무엇을 가르쳐야 할지가

몹시 분명한 내용교과다.

그래서 아이들 삶과 연결하려고 해도

어색할 때가 많다.


예를 들어 교실에 벌이 한 마리 들어왔다 나가서

아이들이 온통 거기에 마음이 빼앗겼다면

도구교과인 국어나 수학시간엔 그것을 가지고

벌이 주인공인 시를 찾아볼 수도 있고,

벌 소리를 의성어로 표현해 볼 수도 있고,

벌의 날갯짓 수를 찾아보고

수학적 상황으로 문제를 삼을 수도 있다.

(요즘 검색이 얼마나속전속결인가!)


 하지만, 내용교과인 슬기로운 생활과의 경우는

다르다.

사람들의 봄철 생활모습을 날씨와

관련지어 이야기하고 있는데

벌이 등장할 여지가 거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벌을 빨리 잊게 하고

 '진정한 2학년은 벌이 방해해도 공부할 수 있다'

는 등의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면서

억지로 교과의 맥락으로 끌고 오게 된다.




그래도 학교규모가 20 학급 정도면

저학년 수업을 더 많이 들어갈 수 있어서

즐거운 생활과 나 바른생활과 등을 같이 넣어

프로젝트 수업을 하거나,

고학년에 국어나 도덕, 사회 등 다른 교과 수업을

지원하면서 아이들 삶과 연결할 여지가 좀 있었다.


그러나 50 학급이 넘는 현재의 학교에서는

1학기에는 2학년, 2학기에는 1학년을 대상으로

슬기로운 생활과만 싹 도려내어 수업하고 있다.

이런 사정이기 때문에

가끔은 아이들 삶의 맥락에서

분명히 놀았는데 뭔가 깨닫게 되는 '

은근한 수업'이 너무 그립곤 했다.


사실 나는 이 '은근한'이라는 말이 좋다.

'넌 학생이고 난 선생이야 그러니까

이러이러한 걸 넌 알아야 해. 모르면 큰 일 나'

와 같은 분위기는 너무 노골적이고,

서로에게 부담스럽다.

이런 취향을 가진 나이기에

소설에서도 대놓고 좋아하기보다

은근히 좋아하는 '츤데레'같은 캐릭터가  

더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어쨌거나 나는 오늘 보결 수업을 위해 '

진정한 일곱 살'이라는 그림책을 준비했다.

그림책은 그림으로 여러 가지가 설명될뿐더러

 내용이 복잡하지 않고, 짧아서

많은 사람이 동시에 생각하기에 좋다.


 여기에 나오는 주인공은 말한다.

'진정한 일곱 살은요, 앞니가 하나쯤 빠져야 해요.

진정한 일곱 살은 채소도 가리지 않고 잘 먹어요....(중략)'


이 책을 함께 읽고,

책상을 뒤로 밀고 둥글게 앉아

진정한 이학년에 대해 이야기 나눌 것이다.

그리고 진정한 이라는 꾸미는 말 대신 어떤 말이

어울리는지 친구와 의논해서 생각해 보고,

마지막에는 자기 자리에서 자신만의 짧은 그림책

 (     )한 이학년은 (     )요. 를 만들고

친구들에게 소개해야지.




진짜 재미있지 않겠는가.

사실 이 시간에 아이들은

꾸미는 말에 대한 감각도 익히고,

진정한 이라는 어려운 말과 비슷한 뜻을

가진 말도 생각해 보고,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쓰게 된다.

내가 생각하기에 국어과 최종목표

창조적인 국어 능력 신장에 딱 알맞은 수업이다.

덤으로 자기이해와 2학년으로서의 목표설정까지.




놀았는데 공부한 그야말로 '은근한 수업'이다.

빨리 보결 시간이 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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