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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온 Jul 21. 2022

대읽다 04-유은실의 '2미터 그리고 48시간'

나는 어떤 이웃인가?

언젠가부터 특정 대상을 독자로 겨냥한 

소설들에 대한 편견이 사라져 버렸다. 

아마 그 처음은 내가 영화관에서 애니메이션

“마당을 나온 암탉”을 보고 원작을 읽고 난 다음이었던 것 같다. 

그 후에 봤던 영화와 원작 소설“완득이”도 그랬다. 


분명 청소년 소설인데, 

청소년이었던 적이 30년 보다 더 지난 나는 몹시 감동했다. 

보통 소설에서 다루어지는 인생의 쓴 맛과 

그로 인해 성숙해지는 주인공, 

인공이 달라짐으로써 바뀌는 환경이 고스란히 들어있었고, 

무엇보다 이해가 쉬웠다. 


나중에 내가 이렇게 이해하고 감동한 이유를 알게 되었다. 

청소년 소설의 특성 때문이었다. 

일반 성인을 대상으로 쓰인 소설 중에는 소위 밑도 끝도 없는 이야기도 있다. 

어떤 때는 형식을 파괴한 소설이 

작가 정신을 잘 구현한 문학성이 높은 것으로 치부되기도 한다. 


하지만 청소년 소설은 내가 위에서 언급한 세 가지, 

주인공의 외적 혹은 내적 역경과 

그것을 겪는 과정에서의 주인공의 성장, 

그리고 성장한 주인공으로 인해 달라지는, 

혹은 주인공이 다른 의미로 받아들이게 되는 환경이 등장한다. 


가만히 보면 열린 결말보다는 닫힌 결말, 

그것도 핍진하게 쓰인 것보다 해피 엔딩을 바라는 

단순하고 얄팍한 문학적 취향을 가진 나에게는 

어쩌면 청소년 소설이 재미지고 

또 보고 싶은 게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한 달에 한두 번 도서관에 갈 때면 

감초처럼 청소년 소설을 몇 권 꼭 끼워 대출한다. 

이 책 유은실 작가의 “2미터 그리고 48시간”도 그중 하나다. 


제목을 보고는 내용을 짐작하기 어려웠다. 

그건 책 표지도 마찬가지였다. 

프롤로그부터 심상치 않았다. 




적은 머리숱 때문에 ‘아만자(암환자)’라고 놀림받는 6학년 선우의 짝인 정음이는 아이들의 놀림에도 모자를 쓰지 않는 선우를 존경하게 된다. 그리고 이야기는 정음이가 중학생이 되어 ‘그레이브스병’에 걸린 일로 이어진다. 그때 정음이에게는 ‘그레이브스병’이라는 변화만 생긴 건 아니었다. 아빠의 사업실패로 부모님이 이혼했다. 양육비를 주지 않는 아빠 때문에 엄마는 공장에서 밤일을 주로 하며 피곤에 찌들었다. 


그런 환경에서 정음이는 ‘큰 병이 아니라 의지만 가지면 나을 수 있다’는 엄마의 희망 고문을 묵묵히 견디고, 옆에서 참견은 하지만 실제로 도움은 주지 않는 아빠의 무책임을 따져 묻지 않는다. 이런 부모님보다 홀로 병원을 다니며 병과 싸우는 정음이가 더 어른스럽다.


 마음속으로 많은 생각과 말을 삼키는 정음이는 병과 함께하는 시간 속에서 이따금씩 선우를 떠올린다. ‘그레이브스병’이 갑상선 기능 항진증을 불러와서 눈이 튀어나오게 되는데 그로 인해 정음이는 ‘놀란 정음’,‘훈민정음’,‘심슨’이라는 별명으로 놀림받는다. 그것을 웃어넘기라는, 둔감해지라는 친구의 조언을 따르려다가 문득 선우를 떠올리고 아픈 걸로 놀리는 A가 ‘나쁜 년’이라고 규정하고 자신을 지킨다. 


4년간의 치료에도 병은 세 번이나 재발한다. 고등학생이 된 정음이는 결국 의사의 권유대로 방사성 요오드 치료를 결정한다. 이것은 말 그대로 방사능에 피폭되어 갑상선을 파괴시키는 것이다. 약한 방사능이긴 하지만 피폭되는 거라 성분이 몸에서 완전히 배출될 때까지 48시간 동안 타인과 2미터 내로 접촉하지 않아야 한다. 정음이는 엄마와 동생 정우를 위해 가출을 결심한다. 가출이라고 해 봐야 아버지가 얹혀살고 있는 친할머니의 빈집이다. 친할머니가 요양병원에 입원하고 아버지가 간병하게 되면서 집이 비게 되었다. 


다행히 가출할 장소는 구했지만, 정음이에게는 고민하고 처리해야 할 일들이 적지 않았다. 아빠는 일시적인 가출을 결심하면서 주고받은 문자에서도 병원에 같이 간다거나 치료 전, 후에 먹어야 하는 요오드 제한식 등을 마련한다거나 하는 등의 보살피려는 의지를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오롯이 정음이 신경 써야 하는 일이었다. 엄마가 챙겨주는 스테이크와 동생 정우와 엄마가 함께 하는 요오드 제한식이 불편하기만 했다. 정음이는 이틀 동안 필요한 물품을 챙겨 뚱뚱해진 가방을 메고 집을 나선다. 


이후 책 분량의 2/3 가량이 ‘요오드 치료’를 받는 날 하루를 자세하게 기술한다. 묵묵히 200 밀리퀴리의 방사성 요오드 캡슐을 삼키고 대학병원 핵의학과를 나선다. 어른스러운 정음이는 자기로 인해 혹시 모를 피해자가 있을까 극도로 신경 쓰면서 병원에서 할머니 집까지 고생스러운 여정을 시작한다. 더운 여름 날씨, 2시간 동안 물도 마시지 못한다. 되도록 사람이 없는 오솔길을 통해 힘들게 대학병원을 벗어나려는데 문자가 도착한다. 짝 인애다. 늘 지저분한 차림새에 소설만 읽는, 별로 친하지 않은 아이. 


평소 친하게 지내던 친구 H와 S는 다소 뻔한 일정을 핑계로 선약했던 정음의 고생길에 동행하지 않았다. 그러나 인애는 정음이 쓰러질까 걱정되어서 왔다며 생수와 수박을 들고 찾아온다. 정음은 많이 놀란다. 인애는 자신이 조손가정이며 그래서 궁색한 살림을 굳이 숨기려 하지 않는다. 심지어 정음에게 라면을 사달라고 뻔뻔하게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런 인애가 정음은 싫지 않다. 2시간의 금식 시간이 끝날 때까지 인애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특히 자신에게 10만 원을 빌려가고 갚지 않은 전남친에게 ‘피폭 키스 사기 상해’를 벌이는 상상도. 


인애와 헤어진 후, 정음은 할머니 집으로 가기 위해 154번 버스와 02번 마을버스를 갈아탄다. 더운 날씨에 비 오듯 쏟아지는 땀, 갑자기 느끼는 요의에 더러운 상가 화장실에서의 경험을 뒤로하고, 할머니 집에 도착한다. 예전처럼 조용한 그곳에서 정음은 눈물을 흘린다. 인애에게 정말 고맙다고 마음속에 울리는 말을 문자로 전한다. 


그리고 아빠와 통화한다. 아빠 전화기 속 할머니는 정음에게 자신은 곧 죽을 거라고, 보고 싶다고, 피폭될까 염려하지 말고 자신의 베개, 이불 모든 것을 마음껏 쓰라고, 그동안 얼마나 고생했냐고 한다. 그 순간 애어른이었던 정음은 아이처럼 마음이 무장해제된다. 정음은 처음으로 어른들의 사랑을 느낀다. 그제야 아빠가 만들어 냉장고에 빼곡히 쟁여둔 요오드 제한식 반찬을 발견한다. 그리고 찾아온 아빠를 만난다. 꽉 끌어안은 아빠의 얼굴에는 주름이 가득했다.  




애어른이었던 정음은 

‘그레이브스병’ 치료를 위한 48시간을 보내게 되면서 

마음속 갑옷을 벗어던진다. 

늘 자신을 위해 희생하면서 주어진 삶을 묵묵히 견디는 엄마와 동생, 

자신이 잘해준 것도 없는데 병원까지 찾아와 준 인애, 

그리고 죽음을 기다리며 아픈 손녀를 안타까워하는 할머니와 

양육비와 같은 도움을 주지는 못했지만 

마음만큼은 늘 정음이를 위했던 아빠를 재발견한다. 


그날 정음이는 사람은 각자 자기의 사정이 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 사정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좋은 사람들이 자기 주변엔 많다는 사실도. 


이 소설에 판타지는 등장하지 않는다. 

정음이가 친구들에게 끝내주는 인기를 끌거나, 

아빠가 양육비를 빵빵하게 보내준다거나,

 병 때문에 튀어나온 눈이 기적적으로 다시 들어간다거나 하는 판타지. 


그럼에도 정음이는 소설 시작 때보다 훨씬 행복해진 것 같다. 

피폭이라는 특별하고 힘든 경험을 통해 정음이는 

주변의 사람들을 새롭게 바라보게 된다. 


덕분에 독자인 나도 새롭게 주변을 둘러본다. 

숨겨진 오아시스처럼 잔잔하고 담담한 우리 일상을 

촉촉하게 적셔줄 마음들을 발견한다.


 평소에는 작고 조용해서 들리지 않던 새소리가 

고요한 아침이면 유독 크게 들리는 것처럼 

책을 읽고 마음이 고요해진 이때, 

소중한 사람들이 떠오른다. 

그들이 준 사랑도, 

내가 줄 사랑도. 


이 책을 덮고 난 지금, 세상이 조금은 더 맑아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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