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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온 Apr 29. 2023

은근한 수업 후편

우리 엄마는 가끔 나에게 말했다.

"입으로 떡을 하면 온 조선이 다 먹겠다."

내가 워낙 말이 앞서고,

앞선 그 말이 어찌나 번지르르하고 그럴듯한지를

핀잔 반 칭찬 반 엮어서 하신 말씀이었다.  




엄마 말씀처럼 나는 계획을 하면서

미리 다 재미있어지는 사람이 맞다.

그리고 그 계획이 꽤 그럴듯해

듣는 사람들이 혹할 때가 꽤 있다.

하지만 실제로 해보면 당연히

그 계획은 안드로메다에 가있고,

나는 헤맨다.

오늘 아침 은근한 수업 어쩌고 한

내 계획처럼 말이다.


2-3에서 2시간의 정규수업을 마치고,

보결수업으로 색다르게 준비한

국어수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은

턱없이 부족했다.

책상을 뒤로 밀고 바닥에 둥글게 원을 그려

앉는데만 10분이 걸렸다.


왜냐고?

 아이들은 책상만 치워도 공부를 하지 않는다는

생각에 흥분한다.

그리고 그 흥분을 몸으로 나타낸다.

즉 쉼 없이 구르고 눕고, 뒹굴었다.

 그 뒹구는 아이들을 하나하나 이름 불러

둥글게 원을 만들고 가까스로 바닥에 앉혔다.


어찌어찌 '진정한 일곱 살'을 읽어주고,

한 명씩 '진정한 이학년은 ~해요'라는

말을 해 보았다.

아, 그러나 이 색다른 분위기가

자지러질 정도로 좋았던 아이들은

말로 더 흥분했다.


"진정한 이학년은 똥을 잘 싸요"

"으하하하하"

민욱이의 이야기가 폭소를 일으키자

옆에 앉은 승훈이는 한 술 더 뜬다.

"진정한 이학년은 똥을 푸악~ 잘 싸요"

"으하하하하"


간간히 책의 내용과 연결시켜

이야기하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의 이야기에는 똥과 방귀가 나왔다.


순간 내가 왜 이렇게 수업을 계획했을까.

그냥 의자에 앉혀서 할걸

아니 그냥 읽어만 줄걸

아니 그냥 하지 말걸.

얼굴이 점점 어두워졌다.


어두워진 내 마음과 얼굴을 눈치챈

몇몇 여자 아이들은 움찔했지만,

눈치 없는 남자아이들은 계속 자지러졌다.




그런데 너무 즐거워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니

내가 하기로 했던 대로 못하는 게 뭐 대순가 싶었다.


재미있게 그림책을 읽었고, 그 내용을 파악했고,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나중에 짧은 그림책을 만든 것을 보니

 '진정한'이라는 뜻을 짐작하고 있었다.

다만 장난기가 발동해서

에너지를 주체하지 못했을 뿐.

이 아이들은 얼마나 재미있게

이 순간을, 책을 기억할 것인가.


그리고 당연히 2학년이 되어 처음 원을 그려

친구들과 앉았는데

노는 것 같고 얼마나 좋았을텐가.


다시 한번 더 해서,

그래서 원으로 둘러앉는 것도,

그림책을 듣는 것도,

함께 이야기 나누는 것도

별로 새로울 것 없이 익숙해지면

아이들은 아마 좀 더 의젓해질 것이다.


오늘은 다만 아이들에게

형식이 새로워 내용에 접근하지 못했을 뿐,

그 형식이 잘 못된 것도,

다시 하지 말아야 할 것도 아니다.


다음에 한 번 더 하면 되지.

그리고 민욱이나 승훈이는

함께 책을 읽을 때의 태도를

차분히 불러 가르치면 되지.

그렇게 그렇게 조금씩 다듬어 나가면 되지.


그러면 될 일을

젊을 때의 나는 그러지 못했다.

기껏 준비했는데 내 계획대로 되지 않는

수업이 속상했다.

내가 지도력이 없는 탓이고,

말을 안 듣는 아이들 탓이었다.

그래서 결국 수업 말미에 화를 내고


"다시는 안 한다."


라는 무시무시한 말로

아이들을 움츠려 들게 만들었다.


미숙한 선생님임에도 불구하고

나와 함께 울고 웃어준 그 아이들이 그립다.

애들아, 미안하고 고마웠어.


수업을 마친 다음 나는 생각했다.


"진정한 50살의 선생님은

교육이 한방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조금씩 다듬어 가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실천해요."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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