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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온 May 03. 2024

유나의 사정

그날은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일어나니 목이 칼칼했고, 침을 삼키니 뜨끔뜨끔했다. 

약간의 미열도 있는지 춥고 머리도 지끈거렸다. 

수업에 들어가기 전, 서랍을 뒤져 종합감기약을 꿀꺽 들이켰다. 


어수선하게 다니는 아이들과 앉아서 자기들끼리 떠드는 아이들.

지난 수업 판서가 말끔히 지워지지 않아 지저분한 칠판, 

아이들에게 줄 안내장과 기타 담임의 물건이 어수선한 교사 책상.

만들기를 했는지 뒤쪽 쓰레기통엔 종이 자투리로 차고 넘쳤다. 

환기가 되지 않아 쾌쾌한 남새가 나는 교실 공기를 훅 들이켜자마자 짜증이 솟구쳤다. 


오늘 그 반 담임이 병가를 냈다. 

바쁜 3월을 정신없이 보내고 4월이 되면 긴장이 풀려 이맘때쯤 교사들은 병이 나곤 한다. 

그날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솟구친 짜증이 교실과 아이들 탓이 아니라 내 몸이 좋지 않은 탓이라 

내 마음을 누르며  아이들을 마주했다. 

창문을 열어 환기하고, 교사 책상을 대충 정리해 가지고 간 수업지도안과 준비물을 놓았다. 

그다음 아이들을 자리에 앉히고, 수업을 시작했다. 


반장의 구호에 맞춰 인사했다.

지난 시간에 배운 것이 무엇이었는지 떠올리며 오늘 공부를 준비할 때였다. 

아까부터 교실 왼편 둘째 줄에 앉은 유나가 유독 부산스러워 보였다. 

연신 뒤를 돌아보고, 주현이와 뭔가를 이야기 중이었다. 

누구라고 말하지 않고 '발표하는 친구를 보고 지난 시간을 떠올려보라'라고 

안내했는데도 소용없었다. 

결국, "홍유나! 지금 누가 발표하고 있지요? 친구가 발표할 땐 어떻게 해야 하나요?"

평소와 달리 무겁고, 걸걸한 내 목소리를 듣자 유나가 움찔하며 앞으로 돌아앉았다. 


그러나 잠시 뿐, 다시 유나는 생글거리며 

이번에는 통로 건너에 앉은 다민이와 뭔가를 주고받는 모습이 보였다. 

아무 말없이 내가 유나와 다민이 사이에 서서 설명을 이어가자 

유나와 다민이는 손에 쥔 것을 슬그머니 서랍 속으로 밀어 넣었다. 

아마 쪽지인 것 같았다. 


그날 수업 주제는 땅 속에 사는 동물과 식물을 관찰하기였다. 

땅 속에 어떤 동물과 식물이 사는지 생각해 보고, 동영상으로 특징을 살펴본 후, 

학교 뜰에 나가 루페로 개미를 관찰하는 활동을 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동물이나 식물이 서로 돕고 사는 공생 관계를 모빌로 나타내는 것까지가 

그날 할 공부였다. 


수업 전반에 읽어줄 그림책의 양도 좀 많았고, 학교 뜰에 나가는 시간도 확보해야 했다. 

그리고 나가기 전에 꼭 짚어줘야 하는 내용도 있어 내 마음이 바빴다. 

나쁜 컨디션에 바쁜 마음. 억지로 누른 짜증까지. 

나는 털끝만 한 자극에라도 당장 폭발할 지뢰였다. 


<지렁이가 흙똥을 누었어>라는 그림책으로 지렁이를 공부할 때였다. 

지렁이를 크게 그린 그림이 나오자 예림이를 비롯한 몇몇이 "으악, 징그러!" 소리쳤다. 

나는 '그래 징그러울 수 있지. 하지만, 지렁이가 얼마나 좋은 일을 하는지 들어보자.' 하며 계속 읽었다. 예림이는 눈을 가리고 아예 책상에 엎드렸다. 

잠시 후, 책을 읽다 눈을 들어보니 유나가 예림이 옆에 서서 어깨를 다독이고 있었다. 

그것을 보자, 순간 이제까지 했던 모든 유나의 행동이 겹쳐졌다. 


잠시 말을 멈추고 유나를 쏘아보았다. 

내가 말을 멈추자 시끌시끌했던 교실이 서서히 조용해졌다. 

그래도 유나는 달라진 분위기를 파악 못하고, 예림이에게 몸을 기울여 뭐라 속삭였다. 

예림이 뒤에 앉은 윤찬이가 유나 팔을 꼭꼭 찌르며 앞을 보라는 듯 손으로 나를 가리켰다. 

그제야 나와 눈이 마주친 유나는 놀라 얼음이 되었다. 


"홍! 유! 나! 자리로 돌아가세요!" 

다시 서릿발 같은 내 목소리에 유나가 어깨를 움츠리며 자리로 돌아갔다. 

이어서 그림책을 읽었지만, 짜증 난 내 마음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오늘따라 유나가 왜 저러지?

그 이후, 개미를 관찰하러 나가서도 자꾸 내 눈에는 수업 주제를 벗어나는 유나만 보였다. 

유나는 개미를 관찰하기보다는 친구와 팔짱 끼며 돌아다니거나 이야기를 나눴다. 


교실로 돌아와 동, 식물의 공생관계를 살펴보고, 최고의 짝꿍이라는 이름으로 둘 씩 짝지어 카드의 양면에 그리기로 했다. 

함께 이야기 나눈 공생 관계는 말미잘과 흰동가리, 개미와 진딧물, 나무와 버섯, 

꿀벌과 해바라기, 악어와 악어새 등이었다. 


자신이 선택한 공생관계의 생물을 카드에 그리고 있을 때였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위와 같은  이야기에 나온 공생관계의 생물을 양면에 그렸다. 

그런데 유나의 카드 양 면에는 각각 공주님처럼 보이는 사람이 그려져 있었다. 

거기다 자기 것을 그리는데 집중하기보다 색연필을 들고 수시로 

다민이, 세라, 승범이 자리를 왔다 갔다 했다. 


이전 시간 유나에게 행동을 고치라고 2번 지적했는데 다시 공개적으로 말할 순 없었다. 

유나 자리 옆에 몸을 굽혀 물었다. 

왜 최고의 짝꿍에 공주님을 2명 그렸는지. 그 둘이 무슨 도움을 주고받는지. 

유나는 생글거리며 말했다. 

"선생님은 나에게 공부를 가르쳐서 머리를 좋게 해 주고요, 나는 선생님을 기쁘게 해 줘요."


머리가 띵했다. 

그러니까 저 공주님 중 하나가 나라는 것이다.  

근데 이게 오늘 유나가 알아야 할 지식이 맞나? 

생물의 공생관계에 대해 다시 설명하고 다시 그리라고 해야 하나?

잠시 유나 곁에 서서 어찌해야 할지 갈등했다. 


그 사이 유나는 색연필을 들고 연신 왔다 갔다 했다. 

나는 왜 저러나 색연필이 없어 저러나 싶어 자세히 보았다. 

가만 보니 유나 책상엔 일반적인 색연필보다 색깔 가짓수가 많은 36색 색연필 철제통이 놓여있었다.  

그것을 다른 친구들에게 3~4자루씩 갖다주고, 다시 가져오고 했다. 


보통 이럴 때 나는 "친구 상관하지 말고, 자기 것에나 집중해."라고 말하곤 했다. 

하지만, 계속 생글거리며 친구들을 챙기느라 부산스러운 유나를 보니 그날은 망설여졌다. 


마지막, 서로 돕는 최고의 짝꿍 옆에 말 풍선을 달아보라고 했다. 

유나는 자신을 그린 공주 그림옆에 "선생님 떼문에 머리가 조아져써요."라고 썼고, 

나라고 한 공주 그림 옆엔 "선생님에게 기쁘게 해조서 고마워."라고 썼다. 


수업을 마무리하고, 쉬는 시간이 되었다. 

아무래도 유나가 오늘 알아야 할 것들을 다시 짚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게 선생병이 도진 것이다.

유나를 불렀다. 

유나에게 공생관계에 있는 동 식물을 다시 상기시키며 이야기를 나눴다. 

그때, 유나는 내용을 모르지 않았다.

다만, 자기는 최고의 짝꿍이라니까, 사람도 동물이라는 내 설명을 기억하고, 

자기가 생각하기에 동물 중에서 사람이 제일 많이 서로 도와서 뽑았다고 했다. 

아, 그랬구나. 나름대로 논리가 탄탄했다. 


그러니까 슬며시 수업 초반 유나가 지적받았던 행동의 이유가 궁금해졌다. 

내가 아까 왜 그랬어라고 묻자 유나는 생글거리며 아 그거요 했다. 

처음 뒤로 돌아본 건, 이전 시간 주현이가 발이 아파서 보건실에 갔던 일이 궁금했고, 

다민이에게 쪽지를 준 건 지우개 빌려줘서 고마워서였고,

예림이 곁에선 건 지렁이가 무서우면 (관찰할 때) 함께 자기와 다니자 했다. 

마지막 색연필은 내가 짐작한 대로 다른 아이들에게 없는 색깔을 빌려줬다. 


유나는 다 자기 나름대로 사정이 있었다. 

친구에게 관심 갖고,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친구에게 어려운 일이 있으면 도와주고,

내가 가진 것을 친구가 필요할 때 나누느라 그랬다. 

내게는 수업에 집중하지 않게만 보이는 유나의 그 행동들의 이면에는 따뜻한 마음이 있었다. 


나는 유나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다른 친구 생각하지 말고 네 할 일만 집중해라 할까?

말할 수 없었다. 

그러고 보면 학교에서 나는 참 이중적이다. 

늘 아이들에게 친구와 가진 것을 나누고, 서로 도와주고,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라고 말은 하지만, 

수업에서는 뒤나 옆을 돌아보지 말고 앞만 보라 한다. 

자기 것만 생각하라 한다. 

마치 경주마같이. 


경쟁을 부추기는 사회에서 공존을 지향해야 하는 세상 그 어디쯤 끼인 존재, 

그게 나인 것 같았다. 

유나를 비롯한 아이들은 마음이 시키는 대로 일관성 있게 살아가는데 

이랬다 저랬다 갈팡질팡하는 것은 나인 것 같았다. 


그래서 유나에게 선생님이 아까 유나에게 왜 그랬을까라고 물었다. 

유나는 아, 공부시간이니깐요. 친구 하고는 쉬는 시간에 말해야 해요

유나와 내가 한참 이야기를 나누자 아이들이 우리 둘 옆을 하나둘씩 에워쌌다. 

아이들은 유나가 다정해서 그래요, 친구를 잘 도와줘요라고 한 마디씩 말을 보탰다. 

공부시간과 쉬는 시간을 시원하게 구분하는 유나의 말을 빌어 

앞으로 되도록 쉬는 시간에 친구와 이야기 나누기로 했다. 


교실을 나서며 마지막으로 여전히 생글거리는 유나에게 

"유나야, 선생님 공주로 그려줘서 고마워. 이렇게 공주 된 것, 선생님은 처음이야."

라고 했다. 

유나는  "다음도 그려드릴게요. 더 긴 드레스 입은 걸로요."라며 손가락 걸고 약속했다. 

아까 먹은 감기약이 이제 약효가 도는지 이제 열이 내리고 좀 시원해졌다. 

그런데 감기약 때문이지 유나 때문인지 정확하지는 않다는 얼핏 생각했다. 

앞으로 습관적으로 아이의 행동을 판단하기보다 왜 그런지 물어보고,

유나에게처럼 어떻게 하는 게 좋은지 같이 이야기 나눠야 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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