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네 방문이 열려 있더구나.
간 밤에 네가 들어오지 않았다는 걸 방문을 보고 알았어.
아마 작업실에 차차와 함께 있을 것이라 짐작했지.
작업에 대해, 앞 날에 대해 고민했겠구나....
나도 오늘은 바빠서 집에 음식을 해두지 못하고 서둘러 나가지만,
오전에 집에 와서 오렌지라도 먹고 나갔으면 좋겠다 생각했어.
이제 좀 있으면 또 사랑니를 뽑아야 하는데
먹을 것이라도 제대로 먹어야 할 텐데...
자식이란 그런 존재인가 봐.
뭘 해도 신경이 쓰이고, 잘해주고 싶고.
내가 우리 엄마에게 그런 존재였듯이
내게 있어서 너는 늘 잘해주고 싶은 사람이야.
지난 일요일 <폴 바셋>에서 너와 나눈 이야기가
며칠 동안 엄마의 머릿속에 맴돌았어.
모처럼의 진지한 이야기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잠깐잠깐 드러나는 고뇌에 찬 네 표정에서
그동안 얼마나 고민했는지 느껴졌기 때문이야.
잘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을 구분해서
지금 학원에서의 경험으로 네가 가르치는데 재능이 있다 했지.
그리고 작가로서 가르치는 일을 제대로 해보고 싶다고도 했고.
그 말을 들으며 엄마는 네가 어른이구나 느꼈어.
자신의 길을 뚜벅뚜벅 찾아가는 네가 자랑스러웠어.
하지만, 내가 지금 내 형편을 생각하니 슬펐단다.
"아들, 지금 당장 서울로 가. 돈 걱정은 말고. 네 꿈을 펼쳐봐."
이렇게 말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아니 한 술 더 떠서
"야, 걱정할 거 뭐 있어? 엄마 아빠 있잖아. 외국으로 가봐."
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네가 꿈을 말할 때마다
엄마는 이렇게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 싶었단다.
하지만 현실은 네가 알다시피 늘 하루하루 살아가기도 벅찼지.
10년이나 긴 시간 동안 형편은 정말 형편없었는데도 너는 꺾이지 않았지.
네 꿈은 나날이 더 다듬어지고, 더 단단해지더구나.
요즘은 가끔 이런 상황에서도 꺾이지 않는 너와,
꺾이지 않음에도 변하지 않는 상황이 묘하게 다가왔어.
왜 너는 꺾이지 않을까?
왜 상황은 변하지 않을까?
보통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대부분 꿈을 꺾어.
그리고 오지 않을 미래를 기약하지.
그러면서 꿈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도 못하고, 꿈을 향해 나아가지도 못하는
엉거주춤한 태도로 방황해.
상황도 마찬가지야.
이렇게 꿈이 점 점 더 다듬어지고 단단해지면 대부분 상황이 변한단다.
누군가 알아봐 주기 시작하고, 좋아해 주고, 도와주기까지 하지.
그런데 지금은 너와 상황 양 쪽 모두 더 팽팽해지기만 하고,
그 어떤 변화도 찾아보기 어렵지.
왜 그럴까?
문득 물이 변화하는 과정이 떠올랐어.
물은 100도가 되어야 끓어서 기체가 되고, 0도가 되어야 얼어서 고체가 돼.
그 중간 1도부터 99도까지 온도의 변화는 엄청나지만, 가시적으로 변화는 일어나지 않아.
1도의 물은 얼음처럼 차갑고, 99도의 물은 손을 넣을 수 없을 정도로 뜨겁지.
하지만 물은 물이야.
우리 아들은 현재 액체인 물이구나.
다른 모습으로 변화하기 위해 자신을 더 다듬고, 꿈을 단단하게 만드는 과정이구나.
네가 작업실에서 보내는 한 순간 한 순간의 시간과 에너지가 흩어지는 것이 아니라
네 안에 차곡차곡 쌓이는 것은 아닐까.
이렇게 생각이 되었어.
아들, 너무너무 고맙고 훌륭해.
눈에 보이는 것에 현혹되기 쉬운 요즘 세상에 보기 드문 젊은이라서.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건강을 잘 챙겨줘서.
엄마도 너처럼 차곡차곡 시간과 에너지를 안에다 쌓아갈게.
자신을 다듬고, 더 단단해지는 과정에서 서로에게 힘이 되는 가족이 되길 바란다.
그럼 안녕.
또 마음 전할게.
2024. 5. 7 엄마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