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벌거벗은 세계사, 벌거벗은 욕망

by 허훈

벌거벗은 세계사라는 제목의 프로그램을 종종 본다.

역사 속의 큰 사건, 인물 등에 대한 이야기를 그 분야의 전문가들이 연예인들과 함께 나와서 강연과 토크쇼를 살짝 섞은 형식으로 풀어나가는 데 꽤 볼 만하다.

십자군 전쟁의 이면이나 프랑스에서 신구교 갈등 같은 역사이야기도 있고 퀴리부인이나 아인슈타인 같은 과학자들의 사생활을 볼 수 있는 과학자 이야기도 보인다. 보통의 교과서에서 보기 어려운 이야기가 있으니 솔깃해서 들을만한 것 같다.

문득 이 프로를 보다가 생각한다. 우리는 우리가 살아온 길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우리가 사는 사회가 지금 현재 이런 모습이 되기까지 어떤 과정이 있었는지 과연 얼마나 알고 있을까.

한때 유행가처럼 모르는 게 약이다라던가 뭔가 알면 큰코다친다던가 하는 시쳇말이 돌아다녔다. 지식에 대한 갈망, 지성에 대한 존경이 사치인 시대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식민지를 겪었거나 근대 이전 권위주의 시대가 오래 지속된 사회일수록 그런 경향이 강하다. 새로운 것을 알거나 감추어진 것을 알아내게 되면 그런 지식뿐 아니라 그런 노력조차 사회와 기득권에 대한 저항으로 여겨지기 때문일 것이다. 19세기말에서 21세기가 20여 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그 점은 별로 나아진 것 같지 않다. 여전히 누군가가 힘 있고 권위 있는 어르신들의 말씀에 대해 나는 생각이 다릅니다라고 말하면 그 사람은 사회에서 밀려나거나 소외되어 심지어 생존 자체가 어려워지기도 한다.

창의성은 이런 풍토에서는 자라나지 못한다.

현대 컴퓨터에 필수로 쓰이는 중앙처리장치(cpu)는 오직 몇몇 미국 회사들이 만든다. 지금이야 그걸 따로 만든다는 것이 너무나 많은 비용이 들어가는 낭비가 되기 때문에 시도조차 안 하는 것이지만 초창기에도 많은 국가나 기업에서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비용이 큰 원인이기는 하지만 한편 그걸 만들기 위해서는 전자공학등의 원천기술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원천기술이란 다른 조건보다 훨씬 창의성에 의존하기 마련이다. 아무리 누가 만든 것을 따라 만든다고 해서 정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다른 생각,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에 대한 존중이란 얼마나 중요한가.

초봄이 되면 우리나라의 도시에서는 이상한 풍경이 벌어진다. 거리의 가로수를 그야말로 닭발처럼 가지치기를 한다. 보기도 흉하고, 환경에도 좋지 않고 시민들도 비판하지만 매년 반복된다. 이런 가지치기를 하지 않아도 가로수와 도시환경에 좋은 것은 얼마든지 있음을 담당자들이 애써 무시하기 때문이다. 다른 생각은 귀찮기 때문에 무시된다. 아니 다른 생각을 할 줄 모른다. 지금까지 해왔으니 앞으로 계속해도 상관없다라던가 지금까지 해 온 것을 왜 중단하느냐고 한다.

벌써 기억에도 희미해질 정도인 이전 정부에서 4대 강 사업이란 것을 했다. 수 조원의 세금을 들여서 큰 강에 보를 지으면서 그 보가 홍수도 막고 농민들에게 농업용수도 공급하고 등등 이런저런 좋은 일을 할 수 있다고 했다. 사실 처음에는 운하를 만들려고 하다가 한 발 양보한 것이라고 했다. 멀쩡한 강의 바닥을 수 m를 파내고 거기에 댐이나 보를 만들면 물 흐름이 막히고 드디어 그 물은 썩게 된다는 것은 초등학생도 알터이지만 당국에서는 그런 점을 싹 무시하고 사업을 진행했다. 지금 현재 내가 사는 곳과 비교적 가까운 낙동강은 그 결과 매년 여름마다 독성 녹조가 창궐하는 곳으로 바뀌었다. 수생 생물도 못 사는 그 물을 용수로 쓰고 정수해서 먹는다는 것을 왜 보고도 저 어른들은 못 본 척을 할까. 꼭 거기뿐 아니라 온 나라에 작은 강이나 개천마다 시멘트가 강 자갈만큼이나 부어진 것 같다. 강은 말라가고 주변 마을도 시들어간다.

이 모든 일이 특정 사업자들에게 돈이 되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 아닌가.

요즘 같이 덥고 습한 날씨에 달리기를 한다면 운동의 효과 외에 사람의 몸에 주는 충격이나 자극 같은 요소를 생각하고 충분히 조심하고 조절해야 한다. 그러나 하루 동안 달리는 동안 거치는 땅을 누가 자신의 소유로 할 수 있다면 아무래도 무리해서 달리려고 하는 사람도 꽤 있을 것이다.

톨스토이는 자신의 소설에서 땅에 대한 욕심이 있던 어떤 남자의 일생에 대해 이야기한다. 해가 질 때까지 자신이 걸은 구역을 가질 수 있다는 조건에 그 사람은 어떻게든 많은 땅을 가지기 위해 걷고 뛰고 하지만 결국 마지막엔 쓰러지고 만다. 결국 그 사람에게 허용된 땅은 자신이 묻힐 만큼 밖에는 안 되는 것이었다.

가로수나 강을 망가뜨려서 돈을 버는 사람들은 그 가로수가 심긴 도시나 그 강이 흐르는 곳 모두가 자신에게 허용된 땅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시민들은 나는 생각이 다릅니다라고 오늘도 말한다. 그래야 삶도 변한다. 아는 것이 약이다.


20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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