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하루 종일 붙박여서 바람을 찍었다
먼 산의 바람꽃이 일어나 어디로 몰려가는지
바람의 파도는 어디까지 진군해서 소멸하는지
오름 아래 바람이 오름 정상의 구름을 만나
굼부리에서 어떻게 사랑하고 흩어지는지
추운 날 더운 날 쓸쓸한 날 배고픈 날
삼백예순 다섯 날 언제나 걸어 다니며
찍고 버리고 울고 웃으며 찍고 또 찍었다
오름의 곡선 관능 너머 흔들리는 억새 바다
바람을 맞는 억새들의 저항과 달관을
바람과 나무들이 주고받는 흥겨운 수작을
맹렬한 바람에 흔들리는 꽃풀들의 자잘한 축제를
하루에도 수십 번씩 얼굴을 바꾸는
속을 알 수 없는 바다와
마라도 아이들의 숨은 꿈을 찍고 또 찍었다
2
제목을 부치지 않는 사진에는
평생을 바람을 찍으러 다닌
떠돌이 사진가의 눈물이 번져 있다
탐욕에 곧 사라질 것들과 이미 떠난
사람들의 등짝에 박힌 슬픔이 찍혀있다
결코 세상을 믿지 않는 산간의 늙은이들과
대책 없이 늙어가는 해녀들의 숨비소리와
길 잃고 헤매는 짐승들의 발자국에
쏟아지는 햇살의 외로움이 박혀 있다
한갓 이름 모를 들꽃도 허리 굽히는 자에게만
향기를 베푸는 법이라고 믿는 그에게
하늘색과 바다 빛과 산색은 고정관념일 뿐
사진 속에서 하늘과 바다와 산은
시시각각 틈 사이로 특별하게 빛났고
언제 어디서나 같은 모양이라도
제주의 해오름과 해거름은
한 번도 같은 빛 같은 색깔일 때가 없었다
3
여행자들은 쉽게 위로를 얻고 떠나지만
몇 푼의 돈을 받고 한 꾸러미의 고통을
받아 드는 것은 언제나 섬사람들이었으나
홀가분과 평안은 항상 없는 자들의 몫이어서
가끔 가난과 불편이 삶에 발목을 걸어도
떠나는 사람이나 잠시 들른 사람은
정작 알 수 없는 그리움이
사진에 남아 평화의 빛으로 타고 있다
미친놈처럼 들판을 가로질러 뛰어다니고
며칠씩 바람 앞에 주저앉아 정신줄 놓은
외로움과 아름다움의 탐닉은
삽시간의 황홀을 보여주었지만
정작 섬에 미쳐 사는 것이 기막히고
필름을 위해 밥 먹듯 굶는 것이 기막히고
뽑아낸 사진에 제풀에 놀라
명줄을 놓아버린 김영갑은
차마 눕히지 못하는 억새밭 바람길에서
지금도 허허 바람으로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