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강 18

- 선유리 풍경

by 전종호

일곱 선녀가 내려와 여기 어디 산골짝에서

노닐었다는 옛날이야기는 잊기로 하자

파주목에서 하루 묵고 개성을 거쳐 의주 가는

선유리는 그 너머 요동으로 가는 길목이었다

요샛말로 역세권, 한마디로 교통 요지였다


나그네들이 임진나루를 건너기 전에

고단한 발을 멈추고 탁배기 한 사발로 목을 축이며

숨 한 번에 하늘 한 번 쳐다보던 주막거리는

경의선이 뚫리면서 그 명을 다하고

전쟁이 나자 미합중국의 병영이 되었다


인민군 중공군과 붙고 는 임진강 전쟁통에

죽지 않고 살아남는 것만이 미덕이었던 시절

미군 공여지와 주변의 퇴폐와 부패는

있는 자들이 부자 되는 꽃놀이패였으나

군대에서 흘러나온 꿀꿀이죽과 부대찌개와

비굴한 웃음은 가난한 이들의 끼 밥이 되었다


부대의 철조망이 튼튼하고 높아질수록

여인들의 웃음은 요염해지고 커져갔으나

미군 떠나자 마을은 한순간에 빈껍데기가 되었다

군인도 물자도 여자들도 모두 빠져나가고

한때 번성했던 부대의 주황 외등 불빛 사라지고

주민들의 치욕과 부끄러움만이 펄럭이는 사이

발 빠른 서울 사람들이 집창촌과 시장을 사들이고

지번을 쪼갠 집들은 노인들의 달세 방이 되었다


빈집과 달세 방과 임대아파트로 가득 찬 마을은

군대의 땅을 거쳐 투기장에 종속되어

사람도 계절도 기운도 비껴가는 듯

벌써 사월이 되고도 벚꽃 송이 피우지 못했다

선유 사거리에서 임진나루까지 걸어가는 길목

게으른 꽃 사이로 찬바람만 빠르게 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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