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종호 여행 칼럼〕 어쩌다, 히말라야 26
돌멩이 명상
체르고리 등정 목표를 이루지 못하고 되돌아오는 길의 기분이 의외로 무겁지 않았다. 실패했다는 느낌도, 이에 따른 기분 나쁨이나 속상함도 크지 않았다. 저기가 바로 고지인데! 하는 안타까움도, 안달복달이나 아쉬움도 크게 일어나지 않았다. 웬만큼 이루었다는 안도감 때문인지, 산길을 홀로 걸으면서 대자연에 순응하고자 했던 수행의 결과인지, 세상일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체념 또는 달관 때문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고지를 포기하자 주변이 눈에 들어왔다. 잊었던 물소리의 존재를 자각하면서 산 위의 빙하를 다시 한번 바라보고 물이 흐르는 경로를 머릿속으로 추적해 보았다. 난공불락처럼 보이는 빙하가 조금씩 물로 풀려나면서 보이지 않는 땅 아래 길을 따라 스미고 모이고 흘러 아래쪽으로 가면서 힘을 합치고 소리를 키우며 콜라(작은 강)를 이룰 정도 되면 세상을 향해 아우성치듯 크게 울 것이다. 콜라들이 합쳐 카트만두쯤 가서 바그마띠 강을 이루고 인도 쪽으로 계속 흐르고 흘러 거룩한 강 갠지스가 되어 힌두인의 애달픈 마음을 풀어주며 숭배의 대상이 될 것이다.
돌아보니 사방이 모두 산이다. 모두가 사오천 미터의 산들이고 멀리 보이는 뒷산들은 그보다 훨씬 더 높을 것이다. 보이는 산마다 거대한 바위 덩어리고, 눈 덮인 바위는 한마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압도적인 기운을 내뿜고 있다. 멀리 보이는 곳에는 거대한 바위 산봉우리가 있고, 가까운 눈높이에는 드문드문 묵직한 암석들이 있으며, 발부리에는 차이고 구르는 돌멩이들이 천지다. 길은 돌멩이들이 부서진 거친 흙으로 덮여 있다. 문득 돌멩이들에 시선이 꽂힌다. 본디 저 거대한 바위가 본체였을 돌멩이들의 삶은 어떤 것이었을까?
물은 아래로 내려가면서 형체를 이루고 소리를 키우며 흐른다면, 골격이 분명하고 우람한 바위는 산 아래로 내려갈수록 형체가 작아지고 약해진다. 물은 아래로 내려갈수록 굵어지고 바위는 내려갈수록 작아지다 결국 흙과 모래로 해체된다. 그러므로 높은 산 위에서 바위 사이 틈을 뚫고 목숨을 이어가던 식물들은 물이 가까워지는 산 아랫마을에서는 쉽게 흙에 뿌리를 박고 새끼를 쳐간다. 땅에 달라붙어 사는 고지 식물이 ‘키’라고 따로 부를 수 없을 정도의 높이라면 산 아래로 내려갈수록 식물의 키는 높아지고 품새도 다양해진다. 어디라고 생명이 쉽게 목숨을 이어간다고 할 수 있을까마는 높은 산에 사는 생명의 생존 투쟁은 눈물겹다.
사람 또한 마찬가지여서 산을 오를수록 자연에 전적으로 의존해서 먹을 것을 해결할 수밖에 없다. 고산지역에 적응력이 뛰어난 야크 같은 짐승에 의지해서 살아가야 한다. 야크의 고기와 젖과 털은 물론이고 배설물까지 땔감으로 이용하는 자연의 온전한 순환 체계에 의존해야 한다. 여기에서 사람은 저 거대한 바위산과 빙하에 의존해서 살 수밖에 없지만, 또한 저 거대함만으로는 살 수 없다. 바위가 바스러지고 부서져 아래로 흘러내려 작은 돌이 되고, 돌멩이가 되고 흙이 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 바위가 부서지지 않으면 집을 지을 수도 없고, 길을 내어 다른 마을로 연결할 수도 없으며, 무엇을 심을 수도 없고 먹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지금 여기서 바위 턱에 앉아 바위와 흙의 진화사를 보고 있다. 이론이 아니라 현장을 그리고 증거를 보고 있다. 히말라야가 현장이라면, 저 아래 너덜갱으로 이루어진 랑시샤카르카 돌 강이 그 증거다. 저 거대함이 해체되지 않는다면 생명은 여기서 살 수 없다. 이름이야 풍화작용이라고 하든 빙하 작용이라고 부르든 자연의 작용에 의하여 거대한 바위가 흙으로 해체되고 있는 것이다.
저 거대한 바위가 우리 발부리에 차이는 돌멩이가 되기까지는 얼마 큼의 시간이 걸렸을까? 별과 지구 사이의 빛의 속도를 광년光年으로 표시한다면 바다가 융기하여 히말라야 산맥이 되고 그 산맥의 거대한 바위들이 돌멩이나 흙이 되기까지는 년年이라는 시간 단위로 헤아릴 수 있을까? 이런 세월을 거쳐 하찮은 돌멩이와 흙과 모래라는 존재 앞에서 인간은 위대한 존재라고 주장할 수 있을까? 우리가 이런 하찮은 돌멩이와 흙과 모래를 보기 위해서 이 높고 깊은 히말라야에 들어온 것은 아니다. 인간의 목표는 산 위에 있고, 높은 곳에 있고, 앞날에 있고, 지식에 있지, 이런 땅바닥에 뒹구는 돌멩이에 있지 않았다. 그런데 돌멩이에서 우리는 배울 수 있는 것이 없는가? 우리는 할 수 있다는 신념 속에서 여기까지 왔다. 도전하고 배우면 더 크고 깊이 있게 살 수 있다고 믿고 살았다. 계획한 것은 노력하면 다 이룰 수 있다고 믿고 살았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 여기서는 인간의 의지와 지식보다 대자연의 작용 또는 섭리가 더 중요하다. 날씨가 허락하지 않으면 어떠한 식물도 얻을 수 없고, 아무리 치밀하게 계획된 등산도 성공할 수 없다. 여기서는 자연에 도전하는 것이 아니라 순응하는 것이 삶의 지혜이다.
이 깊은 산골짜기까지 나를 끌고 온 것은 희망이었던가, 절망이었던가? 희망이든 절망이든 거기에는 내가 나를 주도적으로 어찌해 볼 수 있다는 생각이 전제되어 있었고, 더 높이 오를수록, 더 어려운 과제에 빠뜨릴수록 스스로를 구제할 수 있으리라는 신념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런 생각에는 변하고 흐르는 바위와 물과 달리, 물러나야 할 때 물러나지 못하고 소멸해야 할 때 소멸하지 않으려고 하는 불변不變과 불멸不滅의 욕구가 자리 잡은 것은 아니었을까? 이것이야말로 인간 중심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사고는 아닐까?
수십억 년의 세월 속에서 거대한 바위가 사람의 발에 차이는 돌멩이가 될 때까지의 시간과 과정을 생각하면서 인간의 무모함과 부질없음을 들여다본다. 바위산을 오르려다 오르지 못하고 발부리에 차이고 발바닥에 밟히는 돌멩이를 보며 ‘보아도 볼 수 없고(夷), 들어도 들을 수 없고(希), 잡아도 잡을 수 없는(微) 혼돈이 세계의 본질이며 이는 말로 꼬치꼬치 따질 수 없어 한 마디로 홀황하다’(도덕경 14장)는 노자의 말씀을 생각하고 있다. 우리네 삶도 일일이 말로 다 풀어낼 수 없을 것인즉.
발부리에 차이고 아무나 밟고 가는/ 작고 하찮은 돌멩이라고/ 애초부터 바닥을 구른 것은 아니다// 침묵의 바위로/ 하늘을 우러렀으나/ 비바람에 깎여 틈이 생기고/ 바람에 날아온 솔 씨가 뿌리를 내려/ 수 겁의 안거 묵언 수행을 파하고/ 바위는 마침내 몸을 풀었다// 온전한 것도 영원한 것도 없어라/ 돌이 되고 흙이 되어 숲을 이루고/ 철마다 단풍을 피웠다 지우며// 낮은 자리에서 생명의 밭이 되리라/ 태초의 뜻을 받들어/ 돌멩이는 오늘도 밟히며 부서지고 있다 <돌멩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