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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종호 Nov 25. 2022

<시인의 죄, 죄의 시>

엊그제 대학 동문 작가들의 문집을 받았습니다.

표지를 한 장 넘기는 순간 숨이 칵 막혔습니다.

선생님의 권두시 때문입니다.

이름이 없는 시인들은 더 유명한 이름을 얻으려고 애쓰고, 이름이 있는 시인들은 무슨 상을 받으려고 암약한다 하고, 다소 덜 유명한 시인들은 상 받은 시인들과 심사 제도를 비난하는, 시인이라는 자들의 행태들을 날마다 보고 들으면서 무명 삼류에 불과한 나도 혹시 그들의 곁불을 쬐려는 마음이 없지 않았나 마음이 찔렸습니다.

시대는 다시 어둠의 시대로 돌아가고 있는데

시인들은 세상에 한 푼의 도움도 되지 않는 헛된 명리名利 경쟁에 빠진 것 같습니다.

너는 무슨 시를 쓰고 있는가

90을 바라보는 선생님께서 묻고 있는 것 같아

차마 얼굴을 들기 어려운 아침입니다.

선생님의 시를 읽고 또 읽으며 제 삶을 돌아봅니다


죄의 시/조재훈


시를 쓴다는 것, 부끄럽구나

아름다운 말을 골라야 하는가, 시여

일하는 이의 손, 숨어 우는 아이의 눈물

억울하게 눈 감은 가슴을 떠나

말을 비틀어 무엇을 짜는가

은행 앞 플라타너스에는

새도 와서 울지 않고

버려진 애가 쓰러져 자는데

버려진 애의 건빵만도 못한

시여, 화려한 문패여

겨울 공사장 헐벗은 일꾼들이

물 말아 도시락을 비우고

둘러앉아 몸을 녹이는

모닥불만도 못한 시여, 부끄럽구나

엘리어트가 어떠니 라킨이 어쩌니

우쭐우쭐 떠들어대면서

목판의 엿 한 가락만도

못한 시를 쓰는가, 시인이여

고구마로 한겨울

끼니 이어가는 아우에게

시인이라고 자랑할 것인가

흙을 등지고, 땀을 죽이고

먹고 낮잠 자는

외래어의 시를 쓴다는 것

부끄럽구나, 또 부끄럽구나


부끄러운 시업詩業/전종호


시를 쓰느라 밤새 시답잖은 시간을 보내고

시詩다운 것과 시답지 않은 것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시간을 돌아보는 아침

슴벅슴벅 굴리는 눈알이 편치 않다


시를 읽는다는 게 고상한 것 같아도  

시인이라는 사람들 저 좋아서 먹고

떠들다 노래하고 쏟아낸 배설물들을

치우는 것은 아닌가 몰라


한 편의 시를 쓰고 한 권의 시집을 묶어

남을 읽게 하는 일이란

남의 귀한 시간과 돈과 여력을 빼앗는

되갚을 수 없는 헛지랄은 아닌가 몰라


시를 쓰고 시를 읽는 일이란 게 한심하게도

한 주먹의 통찰도 위로도 쓸모도 없는

쓰는 자 혼자의 만족과 기만이 아닐까 몰라

어쭙잖은 시인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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