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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종호 Nov 09. 2023

유폐된 사람들

큰 바다로 둘러싸여 있어 고립되어서 섬이 아니었다.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육지 본토에 착취당함으로써 종속되어서 섬이 아니었다. 해방 이후 현대사의 비극이 있기 전에도 정치적 박해는 늘 있었고 경제적 수탈은 어쩌다가가 아니라 생활의 상수(常數)로 존재했다. 어쩌면 제주의 비극은 육지에 의한 제주 문화의 자생성 침탈과 상실에서 온 것이 가장 큰 요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섬에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육지와 관계없이 원래부터 사람이 살고 있었던 것이다. 육지와는 다른 언어와 차별화되는 문화로 존재했었다. 이들의 지향성은 반도로 향하지 않고 대마도와 오키나와와 대만으로 연결되는 해양으로 개방되어 있었다. 쿠로시오 검은 해류에 의해서 얼마든지 바다로 나갈 수 있었다. 그래서 제주 신화(神話)의 스케일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장대하고 육지에서는 유사성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상상력을 가진 것이었다. 육지의 정부는 제주를 마치 사람이 살지 않는 곳으로 생각했다. 아니, 사람이 아닌 사람들이 살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원주민들의 문화와 신앙과 신화는 미개하고 대치해야 하는 야만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육지하고 천리나 떨어진 이곳에 성리학의 세계를 구축하려고 했다.      

내가 애석해하는 것은 제주에 대한 정치적 경제적 박해 때문만이 아니라 장대하고 다양한 신화 세계를 쫓아내고 단순하게 육지 체계로 편입시키려 한 것이었다. 제주는 1만 8천의 신들이 살고 있는 신들의 고향이었다. 설문대할망뿐만 아니라 영등굿은 또 어떤가? 마을에는 마을마다 마을을 지키는 본향(마을신)이 있고 모시는 본향당이 있다. 산에는 산신당, 바다에는 해신당, 마을에는 본향당이 있다. 현재에도 450여 개의 신당이 산재해 있다. 마을신의 부모 격인 백주또와 소천국이 모셔져 있는 송당 본향은 당오름 아래 있고, 본향당의 원래 모습을 가장 잘 보존하고 있는 것은 와흘리에 있다.           

신당에는 섬기는 신부(神父), 신모(神母)가 있지만, 본향당은 특히 제주 여인들의 영혼의 지성소(至聖所)라고 할 수 있다. 여인들은 일상적으로 본인에게 일어난 일들, 예컨대, 아이를 낳았다, 아프다, 남편이 바람났다, 바다에 나간 남편이 또는 아들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등 일상의 일들을 보고하기도 하고 남에게는 차마 말 못 할 가슴속의 한과 소원을 여신(할망)께 빌기도 한다. 흰 종이 즉 소지를 가슴에 대고 할망께 빌고 나뭇가지에 걸어 두면 소지에 찍힌 보이지 않는 소원을 다 들어준다. 바치는 물건은 양초 하나부터 과일, 쌀, 술, 천 등 자신의 형편에 따라 한다고 한다. 잦은 무속 행위와 방화 사건으로 와흘리 본향당은 닫혀 있었지만, 까치발로 돌담 너머 팽나무 신목(神木)에 걸린 물색천과 소지는 볼 수 있었다. 본향당을 돌아보면서 제주 여인들의 말할 수 없는 사연들이 무엇이었을까 생각해 본다.      

박토 화산섬의 가망 없는 농사와 날마다 목숨을 걸어야 할 물질, 조공과 진상이라는 이름으로 벌이는 중앙과 ‘육짓것’들의 수탈과 박해, 묵호의 난이나 삼별초 정벌이나 4·3과 같은 국가 폭력으로부터 가족을 지키고 살아남아야 하는 제주 사람들의 삶이 박제화되고 있다. 돌아갈 곳은 물론이요, 바닷물을 헤치고 어딘가로 떠날 수조차 없는 제주 사람들, 그중에서도 가장 약자이면서 제주를 살려온 제주여인들의 가슴속 한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이들과 비교한다면, 갈 길을 마치고 돌아갈 곳으로 돌아가는 자의, 도연명을 흉내 내 쓸쓸함을 가장한 나의 귀거래사의 허영과 사치는 얼마나 하찮고 부질없는 짓인가?          

와흘 본향당                    

서방이 시앗을 보았습니다

시집간 딸이 또 딸을 낳았습니다

웬수 같던 서방이 바다에 나갔다

영영 돌아오지 않습니다

서방도 없는 시집살이가 너무 고됩니다

노망 난 시어머니는 죽지도 않습니다

눈물과 분노가 켜켜이 쌓여서

썩어가는 시커먼 속내를 싸 들고

여인들의 신 본향당 할망께 와서 빌고

주먹으로 탕탕 가슴을 치며 또 빌었습니다

속을 열어 털어낼 것들이 많을수록

하얀 소지素紙를 수십 장 가슴에 대고

울며불며 속엣것을 다 토해내면

눈물과 하소연이 흠뻑 땅을 적시고    

눈물 배 누런 소지를 가지에 걸어 두면

할망이 읽고 하나하나 

한 많은 이 년의 소원을 풀어 줍니다

울고 빌어 속이 가벼워질 수 있도록

당나무 앞에 촛불을 밝히거나

물색천을 나무에 걸어 두거나

색동 치마저고리나 쌀 한 말 바치오니

이 갈가리 찢어진 심정을 안아 주옵소서

이렛당 폭낭 숲이 

한숨과 눈물의 바다로 넘실거립니다.               

*이렛당, 이렛날마다 열리는 당집

*폭낭, 팽나무의 제주 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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