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전종호 Nov 02. 2023

퇴로를 끊고 눌러앉은 사람

귀신에 씐 듯 홀려서 이 섬에 들어와 자신을 스스로 유폐시킨 사람이 있었다. 바람을 찍은 사진작가 김영갑. 이번에 제주에 오기 전까지는 알지 못했던 사람이었다. 두모악 갤러리에 들른 것은 우연이었다. 오랫동안 그의 사진들을 보았다. 한 작품 앞에서 쉽게 발걸음을 옮길 수 없었다. 익숙한 제주의 모습들이 아주 낯선 얼굴이 되어 걸려 있었다.      

사진이 보여주는 색들은 내가 알던 자연의 색깔이 아니었다. 오름에 서면 오르가즘을 느꼈다는 그가 ‘삽시간의 황홀’을 포착하기 위해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한 포인트에서 서서 잡아낸 것들이었다. 갤러리는 온통 오름들로 채워져 있었다. 평생을 두고 사시사철 순간순간을 찍었다는 용눈이 오름은 한 마디로 압권이었다. 돌담과 밭담과 산담 옆에 서 있는 나무들은 바람을 맞고 있었다. 흔들리거나 꺾여 있거나 누워서 일어나는 모습들이 잡혀있었다. 예술로서의 사진을 잘 알지 못했던 내게 두모악 갤러리에서의 체험은 신비한 것이었다.      

돌아와서 그의 책을 읽었다. 그가 중학생일 때 월남전에 갔다 온 형이 사준 카메라로 사진을 찍었던 경험들이 그를 사진의 세계에 들어서게 했고, 제주를 몇 번 드나들던 그는 무언가에 홀린 듯이 제주에 흘러들어와 정착했다. 돈이 없어 굶기를 밥 먹듯 하면서도 오름에 올라가 사진을 찍었다. 바다의 용솟음과 파도의 절망을 찍었다. 쌀 대신 필름과 인화지를 샀다. 중산간을 헤매던 그는 수상한 자로 오인되어 경찰서에 끌려가기도 했다. ‘육짓것’이어서 방 한 칸을 빌리기도 어려웠다. 제주는 그에게 친절하지 않았다.     

제주의 바람이 그를 미치게 했다. 그래서 떠나지 못하고 제주에 남았고 제주의 사람이 되었다. 문학평론가 안성수는 “김영갑은 제주의 산과 바다를 바람처럼 떠도는 광인이었다. 우행호시라고 했던가. 우직한 소처럼 기다리다가 호랑이의 눈초리로 찰나의 시간을 낚아챈다. 기다림이 그리움의 시공을 뛰어넘고 굶주린 영혼이 피사체와 하나가 되는 순간 뜨거운 황홀을 낳는다. 무아지경에서 돌려받는 이 한 방울의 눈물을 위해 그는 몰입의 경지까지 자신을 가혹하게 몰아붙였다”라고 했다.      

어느 날 움직이지 않는 자기 몸을 발견했다. 사진을 찍는데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았다. 사진가에게 손가락은 목숨과 같은 것인데 절망이 엄습해 왔다. 서울을 오가며 치료를 했으나 가망이 없었다. 치료 대신 펴지지 않는 손으로 갤러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5년 동안 루게릭병을  앓으면서 사진을 찍을 수 없었던 폐교된 종달초등학교를 빌려 사진 갤러리를 완성했다. 사진 대신 그는 두모악 갤러리를 남겨두고 떠났다. 마르고 불편했던 자기 몸과 같아 그가 사랑했던 벼락 맞아 죽을 뻔했다가 살아남아 그를 기리는 두모악 감나무 앞에서 나는 지금 그의 예술혼과 삶의 투쟁을 상상하고 있다. 그가 즐겨 거닐던 둔지봉 근처에서 그는 어디쯤 서서 삽시간의 황홀을 기다렸을까 상상하면서 무덤 천지의 둔덕을 걷고 있다. ‘육짓것’이라고 눈길도 주지 않고 배척하던 섬사람들의 땅에서 그를 돌아가지 못하게 잡고 있었던 것은 무엇이었던가? 그는 마흔여덟에 죽었고 살아있다면 나와 비슷한 나이다. 

 바람을 찍었다          

             1     

하루종일 붙박여서 바람을 찍었다

먼 산의 바람꽃이 일어나 어디로 몰려가는지

바람의 파도는 어디까지 진군해서 소멸하는지

오름 아래 바람이 오름 정상의 구름을 만나  

굼부리에서 어떻게 사랑하고 흩어지는지

추운 날 더운 날 쓸쓸한 날 배고픈 날

삼백예순 다섯 날 언제나 걸어 다니며

찍고 버리고 울고 웃으며 찍고 또 찍었다     

오름의 곡선 관능 너머 흔들리는 억새 바다

바람을 맞는 억새들의 저항과 달관을

바람과 나무들이 주고받는 흥겨운 수작을

맹렬한 바람에 흔들리는 꽃풀들의 자잘한 축제를

하루에도 수십 번씩 얼굴을 바꾸는 

속을 알 수 없는 바다와 

마라도 아이들의 숨은 꿈을 찍고 또 찍었다     

                   2     

제목을 부치지 않는 사진에는

평생을 바람을 찍으러 다닌     

떠돌이 사진가의 눈물이 번져 있다

탐욕에 곧 사라질 것들과 이미 떠난 

사람들의 등짝에 박힌 슬픔이 찍혀있다

결코 세상을 믿지 않는 산간의 늙은이들과 

대책 없이 늙어가는 해녀들의 숨비소리와

길 잃고 헤매는 짐승들의 발자국에

쏟아지는 햇살의 외로움이 박혀 있다     

한갓 이름 모를 들꽃도 허리 굽히는 자에게만 

향기를 베푸는 법이라고 믿는 그에게

하늘색과 바다빛과 산색은 고정관념일 뿐

사진 속에서 하늘과 바다와 산은 

시시각각 틈 사이로 특별하게 빛났고

언제 어디서나 같은 모양이라도

제주의 해오름과 해거름은 

한 번도 같은 빛 같은 색깔일 때가 없었다  



                3          

여행자들은 쉽게 위로를 얻고 떠나지만

몇 푼의 돈을 받고 한 꾸러미의 고통을 

받아 드는 것은 언제나 섬사람들이었으나 

홀가분과 평안은 항상 없는 자들의 몫이어서

가끔 가난과 불편이 삶에 발목을 걸어도

떠나는 사람이나 잠시 들른 사람은 

정작 알 수 없는 그리움이 

사진에 남아 평화의 빛으로 타고 있다     

미친놈처럼 들판을 가로질러 뛰어다니고

며칠씩 바람 앞에 주저앉아 정신줄 놓은

외로움과 아름다움의 탐닉은 

삽시간의 황홀을 보여주었지만

정작 섬에 미쳐 사는 것이 기막히고

필름을 위해 밥 먹듯 굶는 것이 기막히고

뽑아낸 사진에 제풀에 놀라 

명줄을 놓아버린 김영갑은 

차마 눕히지 못하는 억새밭 바람길에서 

지금도 허허 바람으로 웃고 있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돌아갈 수 없는 사람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