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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종호 Dec 06. 2023

백수의 특권

 퇴직 후 집에서 맞는 첫날 아침의 특징은 한 마디로 여유였다. 기상 시간 알람을 맞출 이유도, 식탁에 앉아 아침 식사를 서두를 필요도 없었다. 말하는 것을 일로 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드니 아침에 굳이 무얼 먹어야 한다는 생각도 없어졌다. 눈을 뜨면 자동적으로 학교에서 해야 할 ‘오늘의 일’을 떠올리는 습관도 내려놓게 되어서 좋았다. 어제 다 처리하지 못한 업무와 마무리하지 못한 학생 사안, 학부모 민원들과, 그래서 오늘 만나야 할 사람들을 일일이 아침마다 떠올려 보는 것이 교감 이후의 습관이 되었었는데 이제 그런 일들을 하지 않아도 되게 되니 비로소 시간에서 놓여났다는 안도감이 팍 들었다.   

   

이런 아침의 여유와 자유는 자연스럽게 밤의 자유로 이어졌다. 새벽까지 책을 읽는 일이 잦아지고 때로는 밤을 꼬박 새우는 일도 생긴다. 퇴직 이후에 대한 특별한 생각이나 준비 없이 정년을 맞다 보니 말년을 자연 속에서 보낸 사람들의 책들을 빼서 다시 읽는다. 소로우의 <월든>이나 <스콧 니어링 자서전>을 다시 읽고 처음 읽었을 때의 감동을 다시 느끼며 역시 대단한 사람들이구나 하는 감탄을 연발하지만, 솔직히 그들의 삶을 따라서 살 엄두는 내지 못한다.     


코로나가 완전히 멈춘 것은 아니지만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을 조심스럽게 만난다. 대규모 회식은 어렵지만, 개별적으로 만나는 소그룹 모임은 가능해지기 시작했다. 학교에 있다 먼저 퇴직한 사람들도 만나고, 학교 밖에 있다 일찌감치 퇴직한 친구들도 만난다. 저녁에도 만나고 낮에도 만난다. 아직 직장에 있는 사람들은 저녁에 만나지만 특별히 저녁까지 만남을 미룰 이유가 없는 사람들끼리는 낮에도 만난다. 낮에 만나다 보니 낮에도 어쩌다 술을 곁들이게 된다. 평생 술을 어지간히 마신다는 축에 드는 편이었지만 한낮의 술이라니! 새로 발견한 신세계였다. 대낮에 벌건 얼굴을 하고 다니는 것은 조금 민망한 일이었지만, 남들이 못하는, 아니 남들이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다는 일종의 특권의식이랄까 해방감이랄까, 뭐, 하여튼 치기의 통쾌한 묘미도 있었다. 사실 이것도 공무원이나 교사의 구속감이나 시간의 속박에서 벗어난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실 퇴직하면서 마음먹은 것들이 몇 가지 있다. 

첫째, 다시는 돈 버는 일을 하지 않는다. 평생 생계를 위한 일을 하고 살았으니 내 남은 시간을 돈벌이에 쓰지 않겠다는 것이다. 주변에 재취업을 하려는 사람들이 여럿 있어서 든 생각이었지만, 취업을 다시 해야 하는 어떤 불행한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 돈과 관련해서 대형사고를 친 경험도 있어서 누구 시처럼 ‘아내는 항상 옳다’는 마음으로 연금에 대해서도 아내에게 전적으로 맡기고 주권을 행사하지 않겠다는 것도 포함된다.     


둘째, 학교나 학교 관련 주변에서 얼쩡거리지 말자. 사실 초등학교 입학한 이후 군대 시절 빼고 평생 학교에 있었으니 학교 신물 나지 않나, 더 이상 학교 일에 관여하지 말자는 것이다. 퇴직하고도 학교에서 와서 이러저러하게 분에 넘치고 도를 넘는 훈수를 하는 사람 여럿 봤다. 관내에서 교장 하다 교육청 관련 기관에 한 자리 얻으려고 하는 잘 난 인사들도 여럿 보았다. 좋아 보이지 않았다. 학교 가까이 갔다고 신호 위반에 걸리면 벌금도 많이 내니 어디를 가도 학교를 비켜 돌아가자. 교육에 대한 글 따위도 더 이상 쓰지 말자는 것도 포함된다.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그동안 낸 책에서(많기도 하다. 네 권이나 되니) 다 했으니, 문제가 있으면 남아 있는 사람들이 알아서 할 것이다.


셋째, 학교에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먼저 전화하지 말자. 평생 오지랖 넓게 살았으니 만날 사람도 많고 무슨 일을 하자고 제의 받은 일도 많지만, 내가 나서서 누가에게 무슨 일을 하자, 만나자, 만나서 술 마시자 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물론 만나자고 하는 사람을 만난다든지, 먼저 전화해서 안부를 묻는 것을 거절하지야 않겠지만 내가 먼저 후배들에게 전화하지 않겠다는 결심이었다. 밖에서는 현재의 사람이지만 학교 안에서는 철저히 과거의 사람으로 남자는 것이다.     

이게 모두 시간과 관련된 결심이다. 그동안 나도 잊고, 가정도 잊고 살았다. 그런 일은 직장을 가졌을 때로 족하다. 이제 시간의 족쇄에 풀리는 특권을 누리게 되었으니 노심초사에서 벗어나서 여유 있게, 페르소나는 기꺼이 버리고 자발적 고립에 갇혀 낮술도 한 잔, “그렁께 건배!” 하는 자연인으로서의 특권을 최대한으로 누리며 살고 싶었다.           



은퇴 이후     


출근을 위해 알람을 맞추지 않습니다

퇴근을 위해 시간을 잘게 잘라 쓰지 않습니다

선생 똥은 개도 먹지 않는다는 아 쓰디쓴 

그 고독의 시간은 싹둑 잘라내고

마음의 벗을 만나면 언제든 낮술도 좋습니다

한낮의 염려를 떨쳐 발 뻗고 밤잠을 즐기고

땀 흘린 한 해를 채우고 한겨울에는 쉬듯이

평생의 일을 끝내고 빈손으로 맞는 허허로운 시간

늙은 팽나무가 마디와 굽이 없는 시간을 

스스로 혼자서 밀고 끌며 당기듯

작년에 간 기러기 다시 날아오는 하늘을 보며

행여 가슴에 고이는 쓸쓸과 허무와 적막을

무심히 끌어안아야 하는 시절이 오더라도

물러나 숨어 살며 텅 빈 마음 

조용한 세계를 들여다보며 묵묵히 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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