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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종호 Dec 13. 2023

체념과 달관

어려서는 저절로 어른이 되는 줄 알았다. ‘저절로’까지는 아니더라도 조금 노력하면 부자도 되고, 하고 싶은 것 폼 나게 하면서 멋진 인생을 살 줄 알았다.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태어난 우리는 조국 근대화의 주역을 강요받았고, 따라서 해병대도 아니면서 ‘할 수 있다’는 신념이 우리 세대의 신조가 되면서 도전과 성장, 극기와 극복, 불굴과 용기, 이런 말들을 입에 달고 살았다.     

 

교사가 되어서도 저 선생님들처럼 나도 30대, 40대, 50대가 되면 수업도, 생활지도도 막힘이 없는 좋은 선생님이 될 줄 알았다. 시인의 시구처럼 대추 한 알이 저절로 붉어질 리 없듯, 저절로 어른이 되는 것도, 저절로 좋은 선생이 되는 것도 아니었다. 붉어지기는커녕 많은 대추들이 익기도 전에 땅에 떨어져 버리는 것처럼 저절로 되는 것은 하나도 없었고, 더욱이 무언가 잘한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어서 갈수록 ‘선생’ 되기는 어려웠다. 교직의 고단함이 날마다 어깨 위로 가중되었을 뿐이다.      


살아보니 ‘하기’나 ‘되기’뿐 아니라, ‘하지 않기’나 ‘되지 않기’도 학습해야 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하나씩 놓아야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될 만하자 그만두어야 하는 시기가 도래했다. 좋은 사람, 좋은 교사라는 평생의 부담을 벗고 그저 남의 눈에 띄지 않는 장삼이사의 하나로 살아가게 되면서 일종의 체념이 달관(達觀)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자식에 대한 염려도, 아내의 잔소리도 못 들은 척한다. 아이들의 무례함도 못 본 척 다른 곳을 쳐다보지 않아도 되고 이제 오히려 눈을 크게 뜨고 들여다볼 수도 있게 되었다. 체념과 달관이 살얼음 두께의 차이도 나지 않는다.     


도서관에서 빈둥대면서 우연히 집어 든 책이 서머셋 모옴의 <달과 6펜스>였다. 고등학교 때 읽은 책이라 내용은 자세하게 기억나지는 않았지만, 제목이 퍽 인상이 깊었던 책이었다. 알다시피 이 책은 '6펜스'를 버리고 '달'을 찾아, 즉 이상적인 삶을 추구하는 한 무모한 인간의 광적인 삶의 모습을 그린 소설이다. ‘달’이 손으로 잡을 수 없는 특별난 세계라면 ‘6펜스’는 흔하고 평범한 세속적인 세계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직장과 가정과 자기가 살던 도시와 사회적 책임과 보편적 행동 규범을 하루아침에 버리고, 제가 하고 싶은 그림을 그리기 위해 낯선 ‘먼 곳’으로 떠나 이해할 수 없는 기행을 일삼으면서 결국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 도달할 수 없는 세계에 도달한다는 이야기다. 흔히 후기 인상파 폴 고갱을 모델로 하여 고갱이라는 특이한 인물의 이미지와 작가의 상상력으로 창조된 픽션이라고 알려져 있다. 때로는 직업과 가정생활에서의 ‘행위의 보편적 규범’이 아니라 때로는 무모하고 저돌적인 개인적 선택이 예술적 승화와 발전을 위해 크게 기여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람의 일을 어찌 ‘달’과 ‘6펜스’처럼 단순하게 2분법으로 도식화할 수 있겠느냐마는, 굳이 말한다면 생계 활동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기껏 6펜스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직장에서의 은퇴라고 하는 것은 책의 주인공처럼 갑작스러운 단절을 통하지 않고서도 ‘6펜스’의 영역에서 ‘달’의 영역으로 입문할 수 있는 기회이다. 예술만이 ‘달’의 세계라고는 할 수 없고, 누구난 예술을 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지만, 먹고사니즘의 세계에서 벗어나 무언가 예술과 같은 삶의 방식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먹어도 지금과는 다른 의미로 먹고 놀아도 지금까지 하던 방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놀 수 있다는 얘기다.      


교사에게 필생의 과업이었던 책 읽기도 마찬가지다. 책을 읽는 일이 호락호락한 일은 아니었지만, 이제 책 읽기의 방식과 의미도 달라져야 한다. 누군가를 가르치기 위한 생계형 독서가 아니라 나를 배우게 하는 존재형 독서여야 한다. 「넓고 얕은...」이나 「하루에 배우는...」 시리즈 같은 책들이 아니라 삶의 깊은 지혜가 담긴 책을 읽어야 한다. 많이 읽기보다 깊이 읽기가 중요하다. 교리와 주장에 매이지 않는 책이나, 세계를 크게 근본적으로 바라보는 책들을 읽을 필요가 있다. 무슨 주의(主義)나 필요에 의해서 어떤 구역에 제한받고 살지 말고, 묶이지 않는 바람처럼 구름처럼 자유로워지는 글을 읽어야 한다. 


마침 황동규 선생이 새로 번역한 <노인과 바다>가 나와서 다시 읽었다. 같은 책이라도 읽는 나이와 처지에 따라서 느끼고 깨닫는 바가 다른 것 같다. 바다와 싸우는 ‘불굴의 노인’으로 읽었던 청년 시절의 그 노인이 노인과 가까운 나이에 접근하면서 읽으니 ‘달관의 노인’으로 읽힌다. ‘살라오(salao)’, 우리 식으로 이해하기 쉽게 표현하자면 ‘개털’ 취급받는 노인이 무슨 생계를 위해 큰 고기를 잡으려고 먼바다로 나갔겠는가? 남들에게 괄시를 당하며 한물간 늙은 어부로 취급받는 노인은 큰 물고기를 잡았던 과거의 찬란을 재현해서 자신을 따르는 소년에게 보여주고 싶은 열망이 있었던 것이다. <노인과 소년>이 더 어울리는 제목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상어 떼와 사투를 벌이며 커다란 청새치를 잡아 돌아오는 노인에게 도둑과 같은 상어 떼에 대한 미움도 없고 사나운 바다에 대한 원망도 없다. 아프리카 황금 해변의 사자 꿈을 꾸고 자는 그의 잠은 편안하다. 날마다 빈 배로 돌아오는 발걸음도 가볍고, 먼바다에서 물고기를 기다리는 한가함도, 바다와의 대화도 편안하고 친숙하다. 한 마디로 달관의 세계이다.     


책조차도 책의 물성에 지배받지 않아야 한다. 권 수나 독서 속도도 중요하지 않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이해하지 못한 채 남겨두어도 좋다. 책을 읽되 책 속에 빠지지 않는 자세가 중요하다. 무엇에도 집착하지 않는 것이 ‘달’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포기할 것은 포기하고, 체념할 것은 빨리 체념하자는 자세로 살자. 나이 들어서까지 이것저것 집착하면 추하게 된다. 내려놓기(放我)를 해야 한다. 물질적인 것은 물론 독서조차도 그렇다. 저절로 되는 것은 없다. 하물며 늙어가는 것이 저절로 아름다워질리야 있겠는가.           


책을 버린다

십수 년 안고 끌고 다니던 책들을 버린다

한때 맑은 영혼의 기운으로 이끌던

또는 감당할 수 없는 짐이나 굴레가 되었던 것들

이제 버리기로 했다

어떤 것들은 골수骨髓가 되고

어떤 것들은 전사戰士의 투지가 되고

어떤 것들은 한겨울 밤새 잠을 미루고

몰아쉬던 거친 숨소리가 되었던 것들

전사의 마음으로 타오르던 책을 버린다

관점을 버림으로써 투쟁도 지운다

참으로 오랫동안 피곤했다

다음으로 밥이 되었던 책을 버린다

견고한 뿌리가 되어 나의 밥이 되어 주었던

수많은 사상과 이론과 주장과 삶의 문법들

이것들이 내 가르치던 아이들에게 삶의 등불이 되었을까

삶에 위로와 지혜를 주던 책도 버린다

울컥하고 힘들 때마다 등을 토닥여 주던

성현의 말씀과 시인의 노래들

나를 내려놓기 전에 버려야 한다

이제 가장자리에서 낮은 목소리로

숨을 고르고 내 노래를 해야 한다

    - '책을 버리며'. 시집 <가벼운 풀씨가 되어도 좋겠습니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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