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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종호 Dec 20. 2023

노자랑 놀자고?

9월, 10월의 햇빛은 부드러웠다. 하늘은 더없이 푸르렀고 세상은 아름다웠다. 대학에 출강하는 목요일 빼놓고는 시간은 여유롭다 못해 넘쳐났다. 코로나가 종식되지는 않았지만, 좀 그만그만해지자 도서관도 다시 문을 열었다.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도서관이 위치한 공원 벤치에서 책을 읽었다. 책을 보다 졸리면 기대어 졸거나 누워서 잠깐씩 잠을 자기도 했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세상은 고요했고, 내 앞에서 놓인 것은 오로지 자유뿐이었다.     


어느 날 아는 분에게서 전화가 왔다. 퇴직 소식을 듣고 축하 겸 안부를 묻는 전화였다. 이분은 대가 마지막 담임을 했던 학생의 아버지였는데, 그 혁신학교에 있는 동안 아버지회 활동을 하면서 아이들을 데리고 책도 읽고 주말마다 영화도 보여주고 영화토론도 하시던 분이었다.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시는 분이었다. 내가 가끔 돈도 안 되는 철학을 공부한다고, 그것도 서양철학이 아니라 동양철학을, 그마저도 유교철학도 아니고 사람들이 정말 관심 1도 가지지 않는 노장철학을 공부한다고 핀잔하듯 놀리던 분이었다.   

  

인사가 끝나자마자 자기들 공부하는데 놀러 오라고 한다. 공부 모임에 공부하러 가는 것이 아니라 놀러 오라고? 공부 모임 이름이 <노자랑 놀자>라고 했다. 이분이 대학에 자리 잡기 전부터 동네 아줌마들하고 오랫동안 고전공부를 해 온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마’고 대답했다. 노자는 전에도 여러 번 읽었지만, 설명 없이 대개 한문 번역만 해 놓았기 때문에 그 내용과 진의를 파악하는 데 한계가 있었는데 이참에 전공자의 강독으로 고전을 공부할 수 있으니 좋은 기회였다. 일주일 1회, 저녁 한 시간 또는 한 시간 반 정도, 그리고 가끔 동하면 소주 한잔 하며 뒤풀이, 오는 사람 안 막고 가는 사람 안 잡는 진퇴의 자유, 예습 복습 없음, 원서 강독, 그게 조건이었다.     


오래전에 우리 지역에 계신 한문 선생님을 모시고 논어와 맹자, 중용을 공부한 적이 있다. 이분 또한 유교 경전 공부의 깊이가 깊은 분으로 옛날 서당식 성독, 번역, 주석과 해석 등 매우 유용한 공부였는데. 거의 20년 만에 한문 공부를 다시 하게 된 것이다. 그때는 가르치는 분도 배우는 분들도 공자님의 말씀을 하느님 말씀처럼 생각하는 분들이었는데 이 모임은 노자의 가르침 자체도 그렇지만 일단 ‘교리(독트린)’에서 자유롭다. 유교가 제도와 규범을 바로 잡으려는 정명(正名)의 가르침이라면, 도가는 제도와 형식을 부정하는 무명(無名)의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아무려나 한문 읽기의 어려움은 마침표가 없다는 데서 온다. 어디서 끊고 어디서 다시 읽고 해석해야 하는지 잘 모른다. 방대한 한자의 양도 문제였다. 학교에서 그런대로 한자 공부를 한 우리 세대는 글자를 많이 찾아보지 않고도 그럭저럭 원문을 읽어나가는 편인데, 한글세대인 30∼50대는 미리 한자 공부를 하지 않으면 원서를 따라가기가 벅차다. 그럼에도 우리 멤버들은 원서 강독을 오래 해서인지 크게 어려움을 느끼지는 않는 것 같았다. 한문 해석이 주가 아니라 노자가 말하고자 하는 원래의 뜻이 무엇일까 생각하면서 하는 공부였다. 도덕경의 경문뿐만 아니라 왕필의 주석도 살피고 때로 이슈가 되는 주제를 중심으로 서양의 해체철학자들의 담론도 함께 설명을 듣는다. 동네에서 이렇게 수준 높은 강의를 들을 수 있다니!      


또 하나 중요한 점은 멤버들의 전문성이다. 멤버는 강사 빼고 한의사, 화가, 회사원, 주부, 농부 등 여섯 분이었고, 한의사 선생님이 박사 논문 준비로 곧 빠지게 되자 남자는 나 하나뿐이었다. 노자만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멤버들에게서 듣는 얘기가 또한 공부였다. 화가에게서는 그림 이야기를 듣고, 한의사에게서는 한의학과 한의원에 대한 얘기를 듣고, 분재를 하시는 농부에게서는 식물 이야기를 자주 듣게 되는데 이게 다 공부였다. 내가 평생 남을 가르쳐왔는데 인생도처유상수(人生到處有上手)라더니 배움을 주시는 분이 이렇게 많다. 분재를 하시는 분은 중학교 들어간 딸하고 사사건건 부딪혀서 마음의 평안을 얻으려고 노자 공부를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자식에게서도 사업에서도 놓을 것을 놓으면서 마음의 평안이 찾아왔다는 것이다. 학부모가 아니라, 아이들을 키우는 부모의 마음과 입장을 나도 조금 더 일찍 알았으면 좀 더 좋은 선생이 되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도 따랐다.      


학교 밖에 이렇게 자발적인 학습조직이 많다는 것도 학교를 나오고서야 알았다. 지역에 마을활동가들도 많고 이들을 위한 중간지원조직과 여기서 준비한 강의들도 많았다. 문화원이나 농업기술센터에서도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아무튼 상선약수(上善若水)니, 흐르는 물은 앞은 다투지 않는다느니 뭐니 해서 노자는 좋음(善)을 주로 물로 많이 비유했지만, 분재 선생님의 물 이야기는 노자의 물 이야기처럼 도덕적이거나 교훈적인 것 못지않게 실용적인 교훈을 주었다. 분재 선생님에 의하면 물의 생명은 물속 기포의 산소에 있으며, 따라서 식물에게 물을 줄 때도 흔들어서 주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기포를 활성화시킬 수 있어 식물에게 고여 있는 물보다 흐르는 개울물을 주는 것이 훨씬 효과가 좋다는 것이다. 흐르는 것이 문학적인 비유일 뿐 아니라 과학적 진리인 것이다. 사람 서넛만 모여도 그 안에 스승이 있다더니 어디에나 스승은 있고 배움의 장소란 따로 없다. 인생도처가 배움의 시간이요, 장소다. 인연은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흐르는 것이 사는 것이다

흐르면서 굴러가는 것이 

구르면서 노래하는 것이

살아있는 것들의 표정이다

멈추지 않음으로 보글보글 

기포氣泡의 숨으로 졸졸졸 

어린 풀꽃들 키우는 시냇물 

숨찬 노동을 기억하라

작은 새가 일으키는 바람에도

넘어지는 풀 다시 세우는 것은

실뿌리 잡아주는 물방울이니 

큰 소리 내어 울지 못하고

갇혀 흐르지 않는 깊은 강 

강물의 삼킨 속울음을 살피고 

머무르지 않고 흐르므로 

뭇 생명 살리는 

물의 소리를 들으라

흐르는 것이 힘이 있다

  - 졸시, 시냇물이 흐르는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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