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자기의 경계 안에 살 때 편안함을 느낀다. 경계 안에 영역이 생기고 영역 안에서 각자 삶의 목표를 실현하고 이를 위한 다른 이와의 협력도 자기 영역 안에서만 추구한다. 영역은 좁게는 가정에서 마을, 국가를 거쳐 넓게는 인류까지 포함할 수 있으나, 좁은 영역이라야 자기 정체성을 느끼고 방해받지 않는 느낌과 좀 더 아늑함을 즐길 수 있어서 영역의 범위는 자연적, 인위적 부족별로 갈수록 더 좁아진다. 현대에 들어와 세상은 점점 넓어지고 스마트폰 등으로 사람 사이는 좀 더 밀접해지는데 사람들은 오히려 자기 영역을 점점 더 작은 단위로 좁히고 그 속에 숨는 경향이 있다.
일반인들만이 그런 것이 아니다. 학자나 의사, 법조인도 말로는 대중을 위한 초월적 봉사를 내세우지만 표방하는 말과 달리, 전문직주의, 말 그대로 자기들만의 리그에 빠져 있어 경계 밖의 다른 사람의 요구를 잘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밖에서 하는 의견이나 비판을 배척하려고 한다. 구분이 없었던 자연이 선(線)에 의해서 국경으로 갈리고, 본래 철학이라는 이름으로 하나였던 학문이 전공별로 좀 더 세분되어 갔으나, 분별을 위해 나뉘었던 선들은 어느새 자체가 목적인 것처럼 서로 넘나들 수 없는 불가침의 경계가 되어가고 있다.
사람을 키우고 살리는 교육도 마찬가지다. 아이들을 낳아 기르는 것은 본디 가정의 일이었고 마을의 기업(基業)이었으나, 근대 들어서 공교육체제가 편성되면서 주민, 심지어 부모들의 학교참여도 가로막혔다. 부유층이나 종교기관에 예속된 학교를 국가기능으로 돌리고, 사회적 불평등으로 인한 교육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공교육체제를 도입한 호레이스 만(Horace Mann)의 이상은 위대했으나, 교육은 점차 주민 통제를 떠나 국가와 시장통제에 들어가 학교교육(schooling)의 기능으로 한정되었다. 이렇게 교육이 학교교육으로 축소되면서 학교교육은 굵은 선에 의해서 다른 부분과 구별되는 하나의 사회영역이 되었다. 주민들을 배제한 채 이 선 안에서 교사들에 의해 이루어졌던 교육은 국가 명령의 하위체제인 교장에 의하여 통제되기 시작했다. 근대교육의 자생적 발달의 기회가 없었던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식민지 체제의 유산, 해방 후 교육자치가 배제된 미국식 교육제도의 도입, 이어서 들어선 독재적인 정치체제와 민주주의 경험 부족은 국가통제 교육이 더 강화되었다. 한국교육은 주민들의 요구와 유리된 채 오랫동안 학교라는 울타리에 갇혔고, 문서주의, 형식주의, 관료주의에 빠진 교육행정은 교육을 위한 행정인지, 행정을 위한 교육인지 하는 논란에 휩싸이게 되었다.
그러나 최근 행정의 선에 자신을 가두었던 교장들이 학교교육을 넘어 교육의 영역으로 그리고 학교를 넘어 마을과 사회로 넘어오고 교장들끼리의 연합연구모임의 사례들도 늘고 있다.
“A 초등학교의 B교장이 부임 초에 제일 먼저 한 일은 00면과 군내의 주민들과 학교 교사들에게 마을 모임을 제안한 것이었다. 교장의 제안은 교육에 대한 갈망이 있던 주민과 교사들의 마음을 뜨겁게 달구었고, 마음이 뜨거워진 사람들은 한 학교씩 순회하면서 각 학교의 혁신내용과 과정을 공유하며 자기 학교에 적용할 방법을 탐구하였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여기에 참가한 교사들은 세 학교의 공동교육과정을 구성하고 운영하게 되었다. 공동교육과정을 내실 있게 운영하기 위해서 세 학교의 교사들은 매년 학기초 기획 워크숍을 하고 학년말에는 공동평가회를 한다. 이를 지원하기 위한 학부모들의 연대와 협의체 구성도 이루어졌고, 교장단협의체도 결성되었다. B교장은 처음부터 교장 리더십의 범위를 학교에 국한시키지 않고 학교가 포함된 지역 전체에 두었고, 교장이 주도하고 제안하는 형식이 아니라 지원하고 조언하는 형식을 취했다. 즉 판을 깔아주되, 이끌지는 않았다.
C 중학교 D교장은 혁신교육 확장과 교사 자치, 그리고 마을교육공동체 구축을 본인의 핵심과업으로 삼았다. 즉 학생들의 성장과 배움을 위하여 학교와 마을을 연계하는 교육활동을 구체적으로 기획하는 ‘대외협력 담당자’와 ‘배움의 기획자’ 역할을 하면서 교사 자치를 통하여 교사들과 협업하는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그동안 수업혁신과 교육과정 재구성 활동으로 평판이 있는 학교이기 때문에 교육과정 운영에 대해서는 직접 관여하기보다는 교사들과 협업하고, 학생들의 다양한 경험과 성장의 질을 모색하기 위한 ‘추가적 기획’이 필요한 경우, 교육실천을 위한 지원을 넘어서 마을과 연계된 특정 교육활동을 적극적으로 기획하고 교사들에게 제안한다.”
(이혜정외, 경기도교육연구원, 2020)
교장들이 여전히 교사 대중의 비난의 입질에 놓여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이제는 교장들이 교장실을 나와 현장과 지역사회에 참여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명령과 문서 행정의 틀에서 벗어나 현장지원과 현안 타개를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하고 있다. 추운 날씨에도 아침 교문에서 학생들을 맞으며 매일매일 빈곤과 같은 가정적 배경에서 파생하는 문제 즉 학생의 문제행동과 학습복지를 파악·해결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문제해결을 위해 행정의 문턱을 넘어 학교 거버넌스를 구축하고 있다. 지역사회의 자원을 찾아 망(網)을 구성하고 학생의 학습과 복지를 연결하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
학교를 보는 여러 관점도 달라져 효율성 중심의 관료제를 넘어 지금은 교육을 생태계로 봐야 한다는 은유가 대세가 되고 있다. 생태계란 살아있는 유기체 간의 상호작용이 이루어지는 장이다. 생태계 안에서는 선이 없다. 교육생태계로 사고하기 시작하면 학교를 포함한 모든 사회 단위들이 변화의 주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교육과 학습은 별개의 개념이 아니다. 교장과 교사,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도 따로 없다. 함께 배우고 서로 가르친다. 학교 자체도 하나의 독립적 생태계이며 학교를 포함한 큰 단위의 사회도 생태계이다. 미래의 교육은, 인공지능과 같은 기계에 의한 학습이 아니라, 학교 밖 학습의 속성에 대한 성찰을 바탕으로 학교 안의 학습 현상에 새로운 인식과 교장과 교사의 역할에 대한 새로운 고민을 요구한다. 접속, 연결, 함께진화(coevolution)의 사고가 절실해지는 것이다.
선을 넘는 행위는 불안정하고 때로는 위험한 일이다. 본인의 정체성을 훼손하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선 안에 남아있는 동료의 비난도 각오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 잘 났어!’, ‘배신자’ 등의 비난을 무릅쓰고 선을 넘을 때 변화가 시작된다. 권력과 부와 평안이 보장되는 궁궐 담장을 넘어온 싯다르타가 있었기 때문에 대중은 티끌 세계의 안개 속에서 한 줌의 위안을 얻었고, 일반 의사들의 장벽을 넘어온 장기려 박사와 <민중의 의사> 마이클 샤디드 같은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의료보험제도를 얻게 되었다. 관례와 관행의 평온한 선을 넘어 끊임없이 혁신의 지평을 열어가는 교장과 교사들이 많아야 교육이 산다. 나라의 앞길은 교육에 있다. 교장들이여, 교사들이여, 방어선을 버리고 과감히 선을 지우고 선을 넘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