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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종호 Jan 15. 2024

‘눈먼 암탉’의 교육학

- 할계전瞎鷄傳을 다시 읽으며

실학자 이익李瀷은 벼슬의 뜻을 버리고 평생 안산 성호星湖라는 호숫가에서 닭을 치고 살았다. 그는 직접 농사를 짓고 후학을 양성하며 100여 권의 서적을 집필하는 등 열정적으로 새로운 학문에 열중한 사람이었다. 제자들에게도 직접 농사지을 것을 권고했는데 '선비는 농사로써 생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사농합일이 그의 신념이었다. 그는 직접 농사를 지으며 자신의 신념을 실천하였고 그 경험을 살려 농사와 관련된 연구서를 다수 남겼는데, 일상과 현실을 모르는 체했던 당시 주류 성리학자들과는 달리 현실탐구와 실사구시의 정신을 강조했다. 닭을 직접 키우며 습성을 면밀하게 관찰하여 닭에게서 배워야 할 인간의 도리를 글로 남기기도 했다. 이름하여 할계전瞎鷄傳, 즉 ‘눈먼 닭 이야기’다.    

  

“눈먼 암탉이 둥지에서 알을 품고 있는데, 오른쪽 눈은 완전히 덮였고 왼쪽 눈도 반 이상 실눈이 되어 있었다. 먹이가 그릇에 가득하지 않으면 쪼아 먹지를 못하고, 다니다가 담장에라도 부딪치면 헤매다가 돌아 나오기 일쑤니, 모두가 말하기를 어미 닭이 저러고서야 새끼를 기를 수 없다고 하였다. 마침내 날짜가 차서 그 눈먼 닭이 품고 있는 알에서 병아리가 깨어나오니 이를 빼앗아서 다른 어미에게 주려 하였으나, 한편으로 측은하기도 하여 차마 그러지 못하였다. 얼마 후 살펴보니, 별다른 재주가 있는 것도 아니고 항상 뜰 주변을 떠나지 않는데 병아리들이 똘똘하게 잘 자라고 있었다. 다른 어미의 병아리들은 병들고 상처받아 죽거나 어미를 잃어버려 절반도 안 남는데 유독 눈먼 닭의 둥지만은 온전하니 어쩐 일인가? 


흔히들 새끼를 잘 길러 내기 위해서는 두 가지를 잘해야 한다. 즉 새끼를 위해 먹이를 잘 구해야 하고 위험을 잘 막아 주어야 하는 것이다. 먹이를 잘 구하려면 건강하여야 하고 환란을 막으려면 사나워야 한다. 병아리가 껍질을 깨고 나오면 어미 닭은 흙을 후비고 숨어 있는 벌레를 찾아내느라 부리와 발톱이 다 닳아빠지며, 사방으로 흩어지는 새끼들을 불러 모으느라 잠시도 편히 쉴 틈이 없다.  또 위로는 까마귀와 솔개, 주위로는 고양이나 개들을 살피며 부리를 세우고 깃을 펄떡여 목숨을 내걸고 항거함이 마치 용사가 맹적猛敵을 만난 것 같이 한다. 그러다가 숲 속으로 달아나서는 때맞추어 불러서 몰고 오는데 병아리들은 삐약거리며 간신히 뒤따라오긴 하지만 힘이 빠지고 병들기 십상이다. 때로는 엇갈리어 길을 잃기라도 하면 물이나 불 속에 빠져 생사를 기약할 수 없으니, 이렇게 되면 먹이를 구해 준 것도 허사로 돌아간다. 또 조심조심 보호하고 타오르는 불길같이 맹렬히 싸워도 환란이 스쳐 가고 나면 병아리 열에 예닐곱을 잃고 만다. 게다가 너무 멀리 나가 사람의 보호도 못 받으면 사나운 새매를 무슨 수로 당해 내겠는가. 이렇게 되면 환란을 방비하느라 애쓴 것도 허사가 된다.     


그런데 저 눈먼 닭은 하나같이 모두 이와는 반대이다. 멀리 갈 수 없으므로 사람 가까이에서 맴돌고, 눈으로 살필 수 없으니 항상 두려운 마음으로 행동을 조심조심하며 노상 끌어안고 감싸 준다. 그러므로 힘쓰는 흔적은 보이지 않아도 병아리들은 저들끼리 알아서 먹이를 쪼아 먹고 자라난다. 무릇 병아리를 기르는 것은 마치 작은 생선을 삶는 것과 같아서 절대 들쑤셔서는 안 된다. 저 눈먼 닭이 지혜가 없음에도 기르는 방법이 적중하여 마침내 병아리를 온전하게 잘 길러낸 것이다.     


나는 여기에서 비로소 사물을 잘 기르는 방도는 비단 먹이를 잘 먹여주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적당히 보살피면서 각각의 사물들로 하여금 스스로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할 수 있게 하는 데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 요체는 오직 잘 거느리면서 잊어버리지 않는 데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눈먼 닭이 병아리 기르는 것을 보고 자식을 잘 기르는 방도를 터득한 것이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는 헌신적이다. 사람의 어머니도 동물의 어미도 마찬가지다. 새끼를 먹이고 지키고 가르치는 데 목숨을 건다. 흙을 후비고 숨어 있는 벌레를 찾아내느라 어미 닭의 부리와 발톱이 다 닳아빠진다. 까마귀와 솔개, 고양이나 개들을 살피며 부리를 세우고 깃을 펄떡여 목숨을 내걸고 항거하거나 때맞추어 숲 속으로 달아나서 새끼를 불러 모으고 데리고 나오느라 어미 닭은 쉴 틈이 없다. 이 나라의 어머니들 또한 그러하고, 특히 이른바 ‘돼지 엄마들’의 자식 교육은 맹목적이라 할 정도로 헌신의 정도가 심각하다.   

   

문제는 어미 닭이 자신을 던져 새끼들을 먹이고 보살핌에도 많은 경우 새끼들을 다 지킬 수 없는 것처럼 헌신적으로 목숨을 걸고 아이들을 키운다고 해서 아이들이 모두 어머니의 뜻대로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설령 어머니의 뜻대로 어느 대학, 어느 과에 입학시키고, 의사, 변호사를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그 이후의 자식들의 개인적 삶이 행복한지,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삶을 사는지는 알 수 없다.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함과 같은 것(過猶不及과유불급)이라는 것을 ‘눈먼 암탉’에게서 배운다. 눈먼 암탉은 스스로에게 힘이 없으므로 의지할 대상이 누구인가를 알고, 매사 조심조심하는 삶의 태도를 견지한다. 마치 작은 생선을 구울 때 들쑤시지 않고 조심해서 뒤집는 것 같이 한다(若烹小鮮약팽소선). 그러므로 병아리들은 어미에게 전적으로 의지하기보다는 스스로 살아가는 법을 배우게 된다(各遂其生각수기생).      


7월부터 지금까지 우리 교육계를 뒤흔들었던 사건들과 자기 아이를 가르치는 교사들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심이라고는 1도 없는, 최근에 알려진 단톡방 사례를 보면서, 나를 포함하여 이 나라의 부모들은 ‘눈먼 닭’ 같은 삶의 지혜를 가지고 살고 있는가를 뒤돌아본다. 자기 자식에 대한 맹목적 헌신이 지나쳐서 함께 살아갈 친구, 동료, 교사, 사회의 어른들에게 가져야 할 인간 존중의 태도를 가르치고 있는지, 갈등과 분쟁이 일어나면 먼저 조정하고 화해하고 용서할 마음을 가지도록 준비시키고 있는지 반성할 일이다. 자기 자식에게 어떤 문제가 일어나면 학교 안에서 교육적으로 해결하려 하지 않고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강압적으로 해결하려 하거나, 법정으로 끌고 가려고 하는 부모에게는 어떤 문제는 없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학폭법이 생기고 10여 년이 지나면서 우리 학교는 실제로 법원화되었다. 사회적으로 힘이 있는 부모일수록 자기 자식에게 미칠 작은 피해도 수용하지 않고 문제를 학교의 상급기관으로, 법원으로 끌고 간다. 법원으로 끌고 가서 아이가 졸업할 때까지 버틴다. 이 과정에서 발생한 작은 절차적 문제를 찾아내어 본안의 결정을 뒤집는다. 관련된 교사는 더 이상 교육자의 대우도 역할도 인정하지 않는다. 소유욕과 지배욕이 학교를 뒤덮고 있다. 학교에는 이제 교육의 주체는 없고 이해당사자들(stakeholders)만 존재한다. 가해자, 피해자, 책무성 같은 법적 용어들이 난무한다.      


학교의 모든 문제를 법으로 해결하는 제도를 만든 교육부와 법무부의 높은 사람들도, 이 법을 이용하여 자기 자식을 유리하게 끌고 가고자 하는 힘 있는 학부모들과 그 파트너 변호사들도 사실 우리 교육구조에서 배출한 성공한 사람들이다. 그들이 우리 학교교육이 키워낸 성공적인 결과물들이라면 교육 문제와 해결방법을 우리 교육의 내부에서 찾아야 한다. 법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심리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좋은 결과만을 가져오면 된다는 사고방식은 우리 학교구조에서 배워 내면화한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개발주의와 출세주의에 편승한 학교와 교육자의 책임은 없는가를 반성해야 한다.    

  

이런 현상에 대응하는 교육계의 요구가 다른 누군가의 권리를 축소하고, 교사가 가져야 할 권리와 편의를 더 확대하는 방법이라면 이후에 또 다른 충돌을 불러올 수 있다. 우리는 이미 학교에서 발생하는 이런 문제들을 교사와 교장과 학부모와 학생들이 머리를 맞대고 해결해 왔던 좋은 경험을 지난 10여 년 이상 축적해 왔다. 그 이름이 혁신학교든 아니든, 각 시도 교육감의 성향이 어떻든 단위 학교에서 축적해 왔던 경험을 살리고 확대할 필요가 있다. 법을 개정하고 제도를 손보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함께 살아가는’ 학교문화를 심화시켜야 한다. 문화는 인위적인 방법으로 조성되지 않는다. 장관이나 교육감이나 교장의 명령이나 지시로 급조되지도 않는다. 학교에서 교장과 교사들과 학부모들과 학생들이 서로 삼가고 조심하며 섬기고 사랑하고 존중하는 마음이 서로 스며들어 각자의 삶이 녹아날 때 가능하다. 사람은 죽이고 싸우는 동물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삶의 모습으로 보여주며 가르치고 배워야 한다. 물론 이때 교장이 그런 모범의 역할을 해주면 가장 좋다. 그렇지 않더라도 뜻있는 교사들이 여럿 있다면 가능하다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교사들이 ‘거친 학부모’들에게 지나치게 움츠려들 거나 ‘나도 몰라’하는 냉담과 보신주의에 빠져서는 안 된다.   

   

이 짧은 수필, 할계전瞎鷄傳의 핵심은 若烹小鮮약팽소선과 各遂其生각수기생이다. 법치라는 이름의 패도霸道가 횡행하고 자본주의의 퇴행적 행태가 나라의 표준이 된 이 시대에, 너나 할 것 없이 학교에 머리를 들이밀고 덤비는 전투적인 분쟁지역이 되어가고 있는 우리 학교에서 ‘큰 나라라도 다스리려면 마치 작은 생선을 굽듯이 해야 한다(治大國若烹小鮮치대국약팽소선)’는 노자의 무위無爲의 말씀은 실천하기에는 너무 허랑虛浪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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