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 떠나 빈집만 늘고
남은 건 동구 밖 정자나무와 늙은이들
이도저도 안 되어 주저앉은 젊은이 두엇
어린애들은 이제 구경하기 힘들고
내년에 정말 분교가 문을 닫으면
우리도 아주 대처로 떠날 거라며
떠들던 이웃도 돌아간 마당
박꽃만 저 혼자 흐드러지게 웃고
어등골의 그믐밤은 깊어만 가는데
어차피 수입농산물로 무너질 앞날
몇십 년 만의 가뭄으로
논바닥도 가슴이 갈라져 타는데
이적지 깊은 밤을 지켜주던
저 분교 운동장의 외등마저 꺼질 바에는
순이년 공부시키려 우리도 떠날까
화전 일구던 조상들 누운 선산은
명절에나 와 뵙고
-김지섭, 안토니아 코레아의 알비 마을
너도 나도 떠나고, 농촌에 남은 사람들은 노인뿐이다. 아이들을 보기가 어렵다. 젊은이들이 떠난 자리에 이주노동자들이 들어와 살고 있다.
농촌에서의 탈출이 근대화였고 입신의 상징이던 시절이 있었다. 자기 출신의 부정이 성공의 징표라니 이상할 법도 한데, 나도 중학교를 졸업하면서 농촌에서 벗어나 한 톨의 의문 없이 농촌의 생활 문법을 완전히 잊고 살았다. 도시 주변인으로 편입되어 산지 50여 년 만에 고향이 아닌 다른 농촌 마을에 자리 잡고 살게 되었다.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데없다더니’ 경관은 그대로인데 사람 살림은 옛날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아이들이 없는 농촌은 살아있는 경로당이었고, 실제로 다른 지역의 노인들이 죽음을 기다리는 요양원이 한 마을에 몇 개씩 자리 잡고 있다. 이주노동자들에 의해 유지되는 농업은 생명을 먹이고 살리는 일이 아니라 공장식 농업 공장이 되었다. 도시 저임 노동을 뒷받침하는 저곡가 정책은 농촌의 피폐를 가속화시켰으며, 그 폐해 속에서 나이 드신 어르신들의 삶은 속절없이 쓸쓸하고 삭막하였다.
농촌은 한국 자본주의의 막장이다. 농촌은 도시의 식민지다. 우리 동네에는 이렇게 혼자 사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많다.
다섯 살인가 여섯 살 때부턴가
농사 나간 엄마 대신 부엌에 들어가
밥을 안치고 자치고 하던 것이
부엌데기 천덕꾸러기 시작이었어라
전라도에서 휴전선 최전방 여기까지
똥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
시집와서 손바닥만 한 찌질한 농사에
서릿발 같은 시부모 봉양에
강아지 새끼 같은 어린것들 육 남매
키우고 나니 다 나가버리고
어쩌다 보니 영양가 다 빼앗긴
쭈글팽이 깻묵이 되어뿌려 빈 둥지라
어른이 되고 팔십이 넘어서도
남이 해주는 밥 한 끼 못 먹고
아직도 붙어있는 곳이 부엌이라
남편 앞세우고서 아이고 징한 목숨
살 수도 안 살 수도 없고 기다시피
오늘도 겨우 꼬부랑 허리 끌고
밥 한 술 뜨려고 부엌에 나왔다네
- 전종호, '눌노리 김씨 할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