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그대로 22대 총선이 코 앞이다. 지난 총선과 제도적으로 달라진 점은 없다. 18세 청년의 투표권이 이제 안정적으로 정착되었고, 준연동형 비례제도도 그대로다. 구태여 달라진 점을 찾는다면 코로나19 같은 자연적 대재앙이 사라진 대신, 21세기 문명에 어울리지 않는 정체불명의 정치의 실체에 대한 판단을 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8세 청년들의 투표권 행사에 대한 논란은 사라졌지만, 새로 투표에 임하는 학생에 대한 학교의 참정권 교육은 지난 총선에서처럼 전무한 현실이다. 학교에서는 정치에 대한 접근 자체가 조심조심스럽다. 참정권을 비롯한 청소년들의 정치적 권리의식이 희박한 점도 문제다. 입시에 올인할 수밖에 없는 교육 현실 탓이기도 하지만, 기성 정치인이나 성인들이 정치 주체로서의 청소년을 배제하고 이런 관념을 내재화한 결과이기도 하다.
참정권 교육은 단순히 투표 교육의 차원에서 머물러서는 안 된다. 물론 어렵게 얻은 투표권이 기권이 되거나, 투표과정의 잘못된 이해로 무효가 되어서도 안 된다. 투표의 과정과 기표의 방법에서, 첫 투표라고 해서 들뜨거나 일상화된 인증샷의 습관으로 비밀투표의 원칙을 훼손하는 등 투표 무효 행위로 이어져서도 안 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참정권 교육은 참정권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에서 출발해야 한다. 참정권은 저절로 얻은 것이 아니다. 신분제도, 인종 문제와 남녀 간의 성평등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오랜 투쟁의 과정 속에서 오늘날 선거권이 주어졌다. 영화 <서프러제트>를 보고, 투표가 얼마나 소중한 권리인지, 투표권을 쟁취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하고 오랫동안 인내해 왔는지를 마음으로 공감하면 좋겠다. 참정권을 누리는 사람에게는 권리의 문제이지만, 누리지 못한 사람에게는 배제와 차별의 문제이기 때문에 만 18세 청년의 참정권은 당사자의 차별과 배제를 해제한 것으로 인식해야 한다.
나아가 참정권 교육은 선거를 앞둔 일회성 차원의 선거교육이 아니라 시민교육, 또는 정치교육의 차원으로 종합되어야 하고 체계화되어야 한다. 시민교육을 통해서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민주주의 체제에서 권리와 의무는 어떻게 실현되어야 하는가, 미래 세대의 정치 주체로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등에 대한 고민과 성찰이 교육의 틀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교사의 교화(敎化)에 설득되지 않고 미디어의 이미지 정치나 여론을 빙자한 선동정치와 편견으로부터 벗어나 스스로 깨어 있는 시민으로서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일부에서는 여전히 18세 청년의 투표 참여로 인한 학교의 정치화에 대한 우려와 염려가 있다. 교사들의 정치교육을 의식화 수준으로 보는 천박한 의식도 남아 있다. 이미 만 18세 또는 만 16세 투표권을 실시하고 있는 나라들, 특히 교사의 정당 가입이나 교사의 노동조합 활동이 자유롭게 보장되고 있는 나라에서도 학생에 대한 교사의 선거 개입 사례가 있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 특정 교원단체가 교직사회를 과잉대표하고 있지도 않고, 교사들의 의식이 그렇게 정치적으로 나이브하지도 않으며, 만약 그런 일이 발생했다 하여도 자체적으로 걸러낼 수 있는 자정체계가 어느 조직보다 건강하다.
이번 선거에 우리 18세 청년들이 어른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달된, 신문이나 방송에서 알게 모르게 유포한 정치적 선전에서 벗어나, 청년세대 또는 사회적 계층으로서 당면한 현실의 문제, 즉 교육과 입시문제에 영향을 미치는 사회 및 복지정책, 교육정책 등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차원에서 지도자를 선출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정치인들의 말은 달고 그들의 문장은 유려하다. 그들의 말과 글을 보지 말고, 그들이 누군가와 잡은 손과 하는 행동을 살피라. 날마다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국민이 ‘나’인지 ‘나의 이익과 반대편에 서 있는 사람’인지 똑똑히 보아야 한다. 최선이 없으면 차선을 선택하고 차선도 없으면 차악을 선택하라. 투표에 참여하는 올해의 만 18세 청년들에게, 그리고 계속해서 만18세가 될 미래의 청년들은 진부하지만 불변의 ‘권리 위에 잠자는 자는 보호받지 못한다.’는 법언을 씹고 또 씹어 보기를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