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대전 전후체제의 산물인 독일과 한국은 여러 측면에서 비슷한 점이 많았다. 우선 분단체제를 경험했고, 오랫동안 미국을 비롯한 외세의 지배 또는 영향권에 있었으며, 파시즘 국가체제를 오랫동안 유지하다 보니 국가에 대한 맹목적인 복종심과 권위주의 문화에 젖어 있었다. 비약적인 경제발전을 이뤄 ‘라인강’과 ‘한강을 기적’을 이루었고 현재 30-50클럽에 가입된 선진국들이었다. 그러나 두 나라는 1960년대 말부터 서로 다른 경로를 통해 상반된 국가형태로 진화해 갔다.
1969년, 전후 독일 최초의 정권교체에 성공한 사민당(SPD)의 빌리 브란트 정부는 유럽을 휩쓴 68혁명의 시대적 정신을 정책에 반영하기 시작했다. 68혁명은 1968년 5월 파리를 중심으로 일어나 세계 전역에 전파된 거대한 사회 변혁 운동으로, ‘모든 형태의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핵심구호로 내세워 부조리한 것들을 거부하였다. 브란트는 1970년 폴란드 유태인 게토에서 전쟁 희생자에게 무릎을 꿇음으로써 철저한 나치즘에 대한 반성과 함께 과거를 청산하고 대학생에게 생활비를 지급하여 복지국가의 기초를 다졌다.
브란트 정부는 ‘교육(교양)사회’를 제시하고, 독일 국민이 모두 수준 높은 교육을 받아 교양인으로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고등교육을 확충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누구나 부담 없이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생활비를 지급했다. 또 ‘아우슈비츠 이후의 교육’을 내세워 철저한 과거 청산과 함께 교육내용의 혁신을 주장하면서 비판교육을 교육원리로 도입하였다. 즉 교육의 핵심적인 목표는 비판의식을 함양하는 것이므로, 기존 질서에 대한 비판적 안목을 기르고, 불의한 권력에 저항하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정답주의를 정의 권력(definition power)으로 인식하고, 암기식 교육을 파시스트 교육으로 비판하였다. 비판교육의 방법론으로 문제와 현상에 대한 자신의 생각과 해석을 논리적으로 표현하는 글쓰기 교육을 강조하였다.
1976년 보수당인 자유민주당(FDP)에 의해 발의되어 압도적으로 통과된 노사공동결정체 법안의 발의 요지는 “우리 시민들은 국가 시민으로서는 의회와 정부를 구성하는 핵심적인 주권을 가진 존재이다. 그러나 경제 시민으로서는 노예로 산다.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기업의 이사회는 노동이사가 50%를 차지하게 됨으로써 경제민주화의 초석이 되었고, 정교수 중심체제의 대학의 권위주의를 혁파하였다. 대학 등록금은 건국 초기부터 없었지만,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은 알바 등에 시간을 빼앗겨 공부에 소홀하게 되는 것은 부유층 학생에 비해 불이익을 받게 되는 것이므로 부당하다는 것을 이유로 생활비(바푁)를 지급하였다. 또한 당시 서독 사회의 극심한 이념적 대립과 갈등 상황에서도 사회와 국가 그리고 교육의 발전적 미래 지향점을 제시하기 위해 어렵게 정치교육에 대한 합의 즉 ‘보이텔스바흐 합의’를 도출하였다.
한편 한국에서는 1968년 박정희 정권은 3선 개헌을 자행하였다. 이승만 정권의 부정부패에 항거한 4·19혁명을 쿠데타로 뭉갰던 정권은 3선 개헌에 이어, 1972년 영구 집권을 위한 유신체제를 선포함으로써, 우리는 독일과는 정반대의 길로 가게 되었다. 우선, 우리 정치는 국민의 존엄성과 요구를 만족시키는 방향으로 전개되지 않고 민주화 운동을 진압하는 과정으로 진행되었다. 4·19혁명과 1980년 서울의 봄은 쿠데타에 의해 짓밟혔고, 1987년 6월 민주항쟁은 유사 군사정권의 집권으로 의미가 퇴색되었다. 이런 군사정권의 후유증으로 정치적 민주화를 이룬 후에도 직장, 학교, 생활에서의 일상의 파시즘은 청산되지 못했다. 둘째, 노동 배제와 농민의 희생에 바탕을 둔 개발 독재는 ‘한강의 기적’으로 외형적 경제성장을 이끌어냈으나, 재벌과 낙수 이론에 의존한 경제적 방법론의 후과로 고질적 경제적 불평등과 함께, 과잉 정치, 군사문화, 사회·문화의 비민주성과 후진성이라는 숙제를 두고두고 남기게 되었다. 셋째, 해방 후 사립학교에 대한 지나친 의존 정책으로 교육을 실질적인 국가의 고유 사무로 두지 못함으로써 등록금 문제에서 파생한 교육기회의 불공정성은 불평등한 한국 사회구조의 근본 원인이 되었다.
1968년 박정희 정부는 국민교육헌장을 제정하였다. 일제 강점기의 교육칙어를 모방한 국민교육헌장은 우리 교육의 기본 지침이었고 이정표였으며 유신의 이념적 기초가 되었다. 국민교육헌장은 교육에 대한 국가의 종합적인 청사진으로서 국가 신민으로서의 자세와 태도를 규정한 한국판 정치교육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다. 민주주의의 기초 단위로서의 개인인 ‘나’가 아니라 ‘우리는’으로 시작되는 국가와 민족의 발전을 위한 하위 단위로서의 개인을 강조하는 집단주의 교육의 원형이다. 교육은 국민교육헌장의 선포와 시행을 통해 확실하게 정치에 예속되었다. 1978년 전남대 교수들을 중심으로 ‘우리교육지표 사건’ 같은 저항운동이 있었으나 국민교육헌장은 공식적으로 1994년 김영삼 정부에 의해 폐지되었다.
김영삼 정부는 국가주의에서 벗어나 새로운 틀에 의해 국가경영전략을 시도했는데 그 반영의 결과가 5·31 교육개혁이다. 5·31 교육개혁은 ‘21세기 세계화·정보화 및 지식사회로의 문명사적 변화’에 대응하여 교육의 근본적 패러다임의 전환을 통한 개혁조치라고 할 수 있다. 교육의 대상과 장소와 시기를 한정하지 않음으로써 교육을 학교의 울타리에서 해방시켰고, 자치와 분권을 강화함으로써 교육의 지역성과 일상성을 회복시켰으며, 국민의 교육 주권을 보장하고 획일적 교육에서 탈피하여 미래 변화에 대한 교육의 적응력을 강화시켰다는 평가도 있으나, 한편으로는 공동체주의와 시장주의, 보편주의와 개별주의, 수월성 추구와 인성 함양이라는 상호 모순성의 지향으로 현장의 혼란과 충돌을 부추기고 개혁 추진을 지체시켰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이러한 개혁안은 이후 정부의 성격에 따라 자치와 분권을 강화하는 쪽으로 갔다가 시장주의를 강화하는 쪽으로 왔다가 왔다 갔다를 반복하면서, 결국은 이윤과 수월성 추구와 경쟁교육을 본격화했고 한국의 핵심적인 교육정책이 되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5·31 교육개혁은 신자유주의에 의한 자본의 세계적 재편에 따른 한국교육의 경제적 적응과정이었으며, 존엄성 교육이나 교육의 인간화 또는 자유의 실천 같은 교육의 본질에 대한 고민이라고 할 수 없다는 평가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68년을 기점으로 미국의 지배를 비롯하여 비슷한 정치 경제적 조건에 있었던 두 나라는 서로 다른 길을 갔다. 서독은 68혁명의 기치에 따라 인간을 우위에 두고 정치, 경제, 사회적인 질서를 새로 짬으로써 미국의 지배를 벗어나 새로운 형태의 민주주의와 사회 평등의 선도국가가 되었던 반면, 한국은 쿠데타 세력과 재벌의 계속적 지배를 통해 인간을 권력과 물질의 하위에 두는 전도된 가치 규범 속에서 미국보다 더 미국적인 나라가 되어 전형적인 불평등과 양극화의 나라가 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