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과 문화의 틀을 지나 정체성이 선명해진 과정
자신만의 정체성을 그려나가는 과정에서
벗어나야 했던 가족이나 문화의 기대가 있었나요?
내가 자라온 환경 속에서 한국의 여느 부모와 다르지 않게
부모님이 기대한 딸의 모습은 비교적 분명했다.
부모님 말씀 잘 듣고,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에 가고,
안정적인 직업을 가지고,
좋은 배우자를 만나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 삶.
하지만 나는 다른 길을 택했다.
수능을 치고도 바로 대학에 가지 않았다.
점수에 맞춰 갈 수 있는 대학은 있었지만,
그 당시 가고 싶은 학과가 없었다.
그래서 무작정 호텔에서 일을 시작했다.
몸으로 부딪히며 처음 알게 되었다.
돈을 버는 일이 얼마나 쉽지 않은지.
그 경험 덕분에 다시 재수학원을 다니며 공부를 선택했고,
결국 간호학과에 진학했다.
남을 돕는 일이 좋았고,
무엇보다 외국에 나가기 비교적 유리한 직업이었기 때문이다.
겉으로 보면 나는 부모가 원하는 길로 가지 않은 자식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대학병원에 어렵게 취업하면 부모는 자식이 계속
오래 근무하며 수간호사나 간호부장까지 하면서 안정된 직장을 다니라고.
하지만 내 계획은 외국에서 혼자 독립적으로 살아보고 싶었다.
그래서 내가 살던 도시에서 가장 큰 대학병원에서
미국에 가기 전 경력을 쌓는 과정으로 일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 환경은 나와 맞지 않았다.
일도 힘들었지만, 사람으로 인해 더 괴로웠다.
정말 살기 싫다는 생각까지 들었던, 인생의 어두운 터널을 지나던 시기였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고통이 내가 원하는 것을 더 분명하게 만들어주었다.
‘나는 여기에 오래 머물면 안 되겠구나.’
미국 갈 준비를 위해 병원을 그만둘 때
아버지는 서운함을 내비치셨다.
"그래 힘들게 들어가고 그만두나...."
아마도 그가 그리는 딸의 미래는
그 지역의 안정적인 대형 병원 간호사로 일하다가 남자 만나서
자연스럽게 결혼하는 모습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 당시의 나는 여전히 사랑받고 싶은 딸이었기에 마음이 흔들리기도 했다.
그래서 내 청춘을 갈아 넣어 병원에서 번 돈으로 아버지의 빚을 갚는 선택도 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가진 땅을 전부 오빠 명의로 이전한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억울해하면서 배신감을 느꼈다가 나중에 비로소 깨달았다.
각자의 인생에는 각자가 짊어져야 할 몫이 있고
각자의 인생을 주인 되게 살아야 하다는 것을.
그때부터 나는 사랑받기 위해 나를 희생하는 방식을 멈추기로 했다.
가족과 심리적으로 분리되어
내 삶을 살아보기로 했다.
그저 나로, 내 인생을 자유롭게 살아보고 싶었다.
그 욕망이 해외 생활로 이어졌다.
한국 사회에서 자라며 나는 ‘특이하다’, ‘별나다’는 말을 자주 듣기도 했는데,
특히 병원에서 일할 때 그 말은 내가 속한 환경에서 소속될 수 없다는 말처럼
더 날카롭게 들렸던 것 같다.
하지만 외국에 나가자 그 특이함은 개성이 되었다.
기존의 잣대로 평가받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나로 받아들여지는 경험.
내가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
나를 담고 있던 환경이 나와 맞지 않았을 뿐이라는 것을.
돌이켜보면 가족의 기대와 한국 사회의 문화적 기대,
그 두 가지를 지나오며 삶의 터전을 여러 번 바꾸는 과정을 통해
나는 점점 나의 정체성과 내가 있어야 할 환경에 대해 선명하게 알아가게 되었다.
지금 뉴욕과 치앙마이 두 도시를 오가며 사는 노매드의 생활 방식이 그렇게 만들어졌다.
나는 누군가에게 반항한 것이 아니라,
조용히 나에게로 돌아오는 선택을 해왔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