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보니 버킷리스트 달성
Hey, 헤이리
아주 맑은 날,
그간 머릿속에 담아만 두었던 파주로 향했다.
배차 간격이 긴 경의선을 타고 가야 하나 고민했는데, 검색 끝에 홍대에서 문산까지 운행한다는 2200번 버스를 알아냈다.
이 노선을 이용하면 헤이리뿐만 아니라 파주 출판단지, 프로방스 마을, 파주 프리미엄 아울렛까지도 쉽게 갈 수 있더라.
뚜벅이로 돌아다니며 매번 느끼는 거지만, 대중교통이 잘 되어 있는 환경에 사는 것이 참 감사하다.
3,000원 커피 한 잔 값으로 파주까지 편히 갈 수 있다니.
사랑해요, 좌석 버스.
헤이리 1번 게이트 정류장에서 내려 본다.
이 날의 음료는 1+1으로 데려온 파워에이드였는데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푸른 나무들이랑 잘 어울려서 상쾌하게 느껴졌다.
(물론, 라임향이라 상큼하기도 하다)
파주는 먹거리 체험, 문화 예술, 웰빙&힐링, 평화 교육, 쇼핑&이벤트의 섹션으로 나뉘어 있는데 그중 내가 서 있는 1번 게이트 쪽은 문화 예술 구역에 속하는 헤이리 입구였다.
이렇게 보면 아주 넓어 보이는데, 헤이리에서 파주 프로방스 마을까지는 도보 20분 정도, 오두산 통일 전망대까지는 도보 1시간이면 갈 수 있다고 한다.
위치 파악을 한 후 몇 발자국 옮기려는 나의 눈에 '스탬프 투어'라는 텍스트가 강렬하게 들어왔다.
사실 내가 이곳을 방문한 이유는 박물관에 가고 싶었던 것도 있지만, 한국 관광 100선 스탬프 투어 도장을 찍기 위한 것도 있었기에 - 자연스레 스탬프 투어에도 눈이 갈 수밖에 없었다.
때마침 가야 하는 장소도, 내가 원래 가야 하는 곳과 동일하다.
그럼 고민하여 무엇 하리.
일단 나는 목적대로 헤이리 여행 스테이션으로 향하면 되는 것이었다.
나비바늘꽃이라 불리는, 가우라.
5월부터 11월까지 꽃을 피운다고 한다.
사실 작은 철쭉인 줄 알고 걱정하며 찍은 사진이었다.
'이 시기에 피다니, 대체 너 어쩌려고 그래.'
그런데 알고 보니 이 꽃은 제 때 스스로 잘 피어 있는, 알아서 잘하는 철든 아이였다.
꽃 이름도 모른 채 걱정부터 해 버린, 아줌마의 주접이 부끄러워졌었다.
아침 겸 점심으로 브런치를 먹을까 잠시 고민하다가, 가격 보고 재빨리 포기한 카페.
브런치 세트에 24,000원 돈이라니 내 기준으로는 다소 과하다.
스탬프 투어 그냥 지나치는 거, 그거 어떻게 하는 건데요
총총 발걸음을 옮겨 헤이리 여행 스테이션으로 향한다.
한국 관광 100선 스탬프는 여행 스테이션 문을 열고 들어가면 보이는, 오른편에 놓여 있었다.
재빨리 도장을 찍은 뒤, 나의 또 다른 목표였던 통일 동산 관광특구 방문 주간 기념 스탬프 투어 부스로 향해 본다.
건물 옆 야외에 보이는, 저곳 맞다.
살짝 망설이며 다가가려니, 직원 두 분께서 일어나셔서 스탬프 투어 이벤트에 대해 열성적으로 설명해 주셨다.
스탬프를 찍어야 하는 곳은 총 9곳이지만, 다 찍을 필요 없이 3군데만 도장을 찍어 오면 기념품으로 머그컵 2개 1세트를 받을 수 있다고 한다.
다소 무거워 보이는 머그컵 크기에 고민을 살짝 했으나 (평소 가벼운 뱃지 선호하는 편), 그래도 스탬프 투어를 좋아하고 기념품도 좋아하니깐.
딱 3군데 도장만 찍어서 기념품을 받아 보기로 했다.
헤이리 예술 마을은 이미 한 군데 찍혀 있으므로, 가까운 곳 두 곳이 어딘지 여쭤 보았다.
직원 분들께서는 국립 극장 무대 예술 지원 센터와 국립 민속 박물관 파주를 추천해주셨다.
두 군데는 거의 붙어있다시피 하니까, 찍으러 나서 보자.
예전에 얼룩 고양이를 본 적 있는 헤이리의 다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국립 민속 박물관으로 향했다.
무료 관람이 가능한 국립 민속 박물관 파주, 그리고 국립 극장 무대 예술 지원 센터.
국립 민속 박물관은 무료이지만 발권은 필수이다.
들어가서 우측에 보이는 부스에서 스탬프를 찍은 뒤, 들어간 김에 잠시 보관함에 가방을 넣어 두고 구경을 하였다.
그러고 보니 본의 아니게 박물관 투어 하는 데에 스탬프 투어가 도움을 주고 있지 아니한가.
그 후 국립 극장 무대 예술 지원 센터로 향하였는데, 도보에 풀이 많이 우거져 있어서 인도가 덮여 버렸다.
이러다 차도로 가야겠구나 싶어 살짝 길을 돌아서 국립 예술 극장으로 향했다.
12시가 안 되어 스탬프 투어가 끝이 나 버렸다.
기념품을 받기 위한 조건 충족, 땅땅.
헤이리 여행 스테이션 근처까지 도착하니 12시 3분이었는데, 이벤트 부스의 점심시간은 12시~13시라고 말씀해 주셨던 것이 기억나 버렸다.
본래는 기념품을 받고 난 뒤 편의점에서 삼각김밥을 사 먹고 돌아다닐 예정이었다.
하지만 그렇다면, 나머지 50분을 뭘 하며 보내야 하는가.
사실 여행 스테이션을 찾느라 같은 곳을 뱅뱅 돌았던 터라 파주 헤이리가 나름 친숙해져 버렸기에 50분을 또 산책한다는 것은 살짝 무리가 있었다.
그래서 시간을 보내기 위하여 선택해 버린, 다소 거한 점심밥.
각성 상태라 이 당시 피곤함은 느끼지 못하였지만, 전날 23,000보를 걸은 상태였다.
분명 미래의 내가 기진맥진할 수도 있기 때문에 - 어쨌거나 단백질이 필요하기는 했다.
관광지의 음식은 마음속 허들이 굉장히 낮은 편이지만, 이곳의 쌀국수는 그동안 먹었던 쌀국수 중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맛있는 집이었다!
다음에 헤이리에 또 오게 된다면 그건 이 쌀국수가 생각나서일 지도 모르겠다.
물에 빠진 고기를 먹지 않는 성향임에도 야금야금 고기 토핑을 모두 집어 먹고 나왔다.
영수증 리뷰를 작성하고 받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잔 들고 여유로이 짧은 산책도 즐겨 본다.
'마음이 닿길'이라는 길을 걷기.
커다란 의자 위에 올라가 보고 싶은 충동을 조금 느꼈으나, 왠지 다 큰 어른이 혼자 올라가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마음을 접었다.
뭐, 사실 올라가 봐도 되긴 할 것이다.
그런데 만약에 구조받을 상황이 생기기라도 한다면?
- 어디서 오셨어요? 같이 오신 분 계세요?
-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 근데 여길 대체 왜 혼자 올라가셨던 거예요?
... 등의 대답에 유연하게 대처할 자신이 도저히 없다.
안 다치면 되긴 하지만, 인간의 미래는 모르는 거니까.
헤이리는 여러 가지 다양한 볼거리가 있고 여러 포토스팟이 있고...
뜯어보면 볼수록 갖가지 컨셉으로 알록달록 화려한 곳이었다.
걷다 보니 오후 1시가 되어 여행 스테이션에 기념품을 받으러 갔다.
간단한 인적 사항을 기록한 뒤 머그컵 2개 세트가 담긴 상자를 하나 받을 수 있었다.
가방이 과식한 것처럼 둥글넓적해졌다.
이 가방을 들고 나는 프로방스 마을까지 구경할 예정이었고 말이다.
아스카 게임 박물관에 가다
헤이리에는 크고 작은 박물관이 제법 많이 있다.
그리고 은근 입장료가 비싼 곳도 있다.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소량의 입장료 지출이 모이고 모이면 금세 몇만 원을 훌쩍 넘겨 버릴 것 같은 위험한 곳.
그러므로 이 날은 딱 한 군데만 가기로 결심했다.
아스카 게임 박물관의 외관 한 컷.
처음에는 외관 때문에 살짝 걱정이 되기도 했다 - 이곳에 과연 들어가도 되는 것인가.
평일이라 그런가 방문객도 없어 보였다.
하지만 헤이리에 온 가장 큰 목표가 이곳이었기에, 입장료를 내고 들어갔다.
네이버 예약을 하면 정가 7,000원보다 조금 더 저렴히 방문할 수도 있지만, 어쩌다 보니 현장 발권.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옛날 단말기에 홀라당 마음을 빼앗겨 버린 나는, 이곳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을 품기 시작하였다.
지금은 완결한 브런치북과 매거진을 정리해서 히스토리가 남아 있지 않는데, 사실 나는 피쳐폰 덕후이다.
여주에 있는 폰 박물관에 다녀오기도 했던 과거(?)를 지닌 사람으로서, 헤이리에 있는 피쳐폰들을 보니 동창회에 간 것처럼 너무 반갑고 좋았다.
그리고 등장하는 여러 종류의 레트로 게임기들.
키덜트 (혹은 살짝의 오타쿠)인 나는 설레기 시작했다.
사실 나는 게임을 좋아하지만, 게임에 대해 잘 모르는 편이다.
어렸을 적 오락실에서 살았던 것도 절대 아니다.
오히려 소음에 지나치게 민감하여 귀를 틀어막고 피하면 피했지.
하지만 게임을 꾸준히 좋아해 왔던 것은 맞다.
어린 아가 시절에는 1천 원짜리 졸리 게임을 섭렵하였고, 보드 게임을 직접 만들어 즐기기도 한 사람으로서, 그리고 게임 업계에서의 정년퇴직을 한 때 꿈꾸었던 사람으로서 아스카 게임 박물관은 (다소 다르지만) 게임에 대한 열정을 깨닫기에 충분한 곳이었던 것 같다.
아스카 게임 박물관에서 웬만한 레트로 게임들은 무료로 즐길 수 있다.
철권, 테트리스 등 스테디셀러 게임들도 있다.
유료가 있다면, 두더지 게임이나 농구공 던지는 게임 등 약간의 액티비티(?)가 들어간 것들.
2층 공간으로 올라가 보면, 만화책이 반겨 준다.
게임과 만화책이 있는 곳이라니!
이곳은, 누가 라면만 끓여다 준다면 하루 종일 구경하며 놀 수도 있는 곳이겠구나 싶다.
심시티, 민나노골프, 드래곤퀘스트, 디아블로2.
나름 추억의 게임들이 반겨 주는 장소.
눅눅하고 음침한 분위기가 물씬 풍기던 디아블로2가 생각나며 약간의 추억에 빠져 들었다.
사실 디아블로2도 좋아하긴 했으나, 웨스트우드 사의 액션 RPG인 녹스(NOX)가 나의 최애였다.
정말 수백 번 플레이했을 그 게임.
숨겨진 길을 찾기 위해 지역을 뱅뱅 돌았으나 60~70% 정도밖에 못 찾아 아쉬웠던 기억들이 떠올랐다.
그립다, 그 시절.
다시 플레이하면 좋겠는데.
쌓여 있는 비디오 코너.
약간의 TMI를 이야기하자면 - 나는 영화나 드라마, 소설을 잘 안 본다.
너무 빠지면 마음이 아파서...라고 하면 이해가 될런지.
그래서 엄청 유행한 베스트셀러나, 막장 드라마, 영화 등은 이름만 들어본 것들이 대부분이다.
... 말아톤 빼고 저 비디오들이 무슨 내용인지 모르겠다는 이야기를 좀 길게 설명해 본 것이다.
다시 1층으로 내려와서 가장 재미있게 했던 퍼즐버블을 한 판 더 한 다음에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조금 더 즐겨도 좋았겠지만, 평일이라 그런가 방문객이 없어서 뻘쭘했기 때문이다.
혼자 와서 한 시간 동안 게임 하는 게 고스란히 노출되는 환경이라니, 너무 민망하잖아.
그리고 여기에 모기가 너무 많기도 했다.
게임기 열기 때문에 따뜻해서 그런 건지.
잠시 있는 동안에 8~9군데를 물려 버렸는데 점점 부풀어 오르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네이버 플레이스 리뷰 작성 후 받은 맛기차콘 간식을 먹으며 파주 프로방스 마을로 향했다.
헤이리에서 파주 프로방스 마을까지는 도보로 20여분 거리인데, 아주 약간의 오르막 코스가 존재한다.
안녕, 프로방스
나름 설레는 마음을 품고 방문한, 파주 프로방스 마을.
예전에 개장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정말 와 보고 싶은 곳이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무언가 기대와는 많이 다른 곳이었다.
블로그에 아직도 종종 올라오는 파주 프로방스 방문기를 읽어 보면, 아기자기하고 아름답고 특히 야경이 멋진 곳이라는 이야기가 많았다.
하지만 내가 느낀 것은, 아름다움 보다는 황량함에 가까웠다.
순간 멍해서 멈춰 있다가 아쉬운 마음으로 사진을 찍었는데, 사진은 또 제법 잘 나와서 살짝 억울하기도 했다.
이미 기념품을 받아 버린 통일 동산 관광특구 스탬프 부스 발견.
가방에 넣어 두었던 리플릿을 꺼내어 파주 프로방스 마을 칸에 도장을 찍어 보았다.
도장 디자인이 제법 예뻐서 우울함이 살짝 걷혔다.
방문객이 거의 없다시피 하여, 지나가는 것만으로도 호객행위를 받아 부담스럽기도 했다.
원래는 파주 프로방스 마을에서 커피를 한 잔 하려고 하였으나, 마음을 바꾸고 발길을 돌려 2200번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였다.
버킷 리스트를 달성한 날이기는 한데, 왠지 괜히 왔다는 생각이 들며 다소 찝찝함을 뒤집어쓴 파주 나들이는 이렇게 마무리되었다.
집에 와서 설거지를 하려 꺼내든 머그컵 세트.
하나에는 헤이리가, 하나에는 프로방스 마을이 그려져 있다.
프로방스 마을을 다시 갈 것 같지는 않지만, 헤이리는 한번 더 갈 것 같다.
가고 싶은 박물관이 두어 군데 더 있기도 하고, 갈대광장을 가을에 가면 멋질 것 같기에.
그리고 맛있는 쌀국수집도 있고 말이다.
그리고 다음번에는 2200번 버스를 타고 파주 출판단지도 가 보고 싶어졌다.
아, 오두산 통일 전망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