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탬프북을 부여잡은 채
계획된 즉흥 여행의 시작
추석 연휴.
전날 이루어진 응급 치아 신경 치료를 받은 나는, 대충 통증을 견딜 만한 상태였다.
'아, 나가고 싶다.'
통증과 함께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하는, 외출의 욕구.
어쩔 수 없지.
네이버지도를 켠 채 즐겨찾기 해 둔 곳을 물끄러미 훑어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외출.
아침에는 비도 오고 바람도 제법 세게 불었다.
하마터면 화성 성곽길 스탬프 투어 하면서 뒤집혔던, 여차하면 한번 쓰고 버리자는 맘으로 들고 나온 민트색 우산이 한번 더 뒤집힐 판이었다.
'괜히 나왔나?'
고민하면서 발길을 찬찬히 옮겨 보는 와중에 도착한 버스.
머릿속으로 휴식과 여행을 열심히 저울질하며, 자동적으로 버스 계단에 발을 내디뎠다.
아침의 영등포역.
나는 이곳에서 인생 첫 무궁화호를 경험할 예정이었다.
'기차에서 도시락 까먹는 재미가 있다던데.'
기대감이 순간적으로 뭉글하게 부풀어 올랐으나, 고작 열차 한 시간 타고 가면서 간식거리를 사 가는 것은 왠지 부끄럽게 느껴졌다.
나란 인간은 혼자 뷔페는 가지만, 기차에서 집중받아 가며 뭔가를 먹을 자신은 없다.
적당히 눈에 띄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로 결심했다.
편의점 삼각김밥은 매진.
그리고 애매하게 30분가량 남은 시간.
결국, 눈앞에 보이는 분식집에 들어갔다.
'어차피 입을 크게 못 벌리니까 삼각김밥을 베어 먹기는 힘들었을 거야.'
그래서 고른, 더 크고 단단한 김밥.
조각나 있어서 한입에 먹을 수 있으니 괜찮지 않을까?
김밥 속 단무지와 당근은 훌륭한 부비트랩이었다.
맛있고, 아팠다.
아마 나를 바라보던 타인들은 내가 김밥의 맛에 감동하여 눈물을 글썽이는 줄 알았을 것이다.
실제로 맛있었기에, 조금 덜 억울하긴 했다.
김밥을 씹으며 새로운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천안에 가면 병천 순대를 먹어야 하는데, 어쩌지?'
무궁화호를 타다
8시 32분에 출발하는 무궁화호 탑승을 위하여 9번 플랫폼으로 향했다.
무궁화호를 타면 여수까지 갈 수 있구나 - 머릿속 상식 섹션에 정보가 하나 추가 되었다.
그리고 무궁화호에는 좌석 테이블이 없다는 정보도 업데이트되었다.
간식을 사 왔더라면 굉장히 뻘쭘한 상황이 되었겠군...
눈물을 흘리며 김밥을 먹고 온 것은 알고 보니 굉장히 잘한 일이었다.
1시간 정도 덜컹덜컹.
천안역에 내린 채 무궁화호 열차를 한 번 사진으로 남겨 본다.
레트로한 열차의 디자인, 감동이다.
천안이다
사실 그간 천안에 여러 번 오기는 했었다.
연인과 데이트하면서, 친구랑 여행 오면서.
심지어 모두 급행도 아닌 1호선을 - 선 채로 말이다.
그 시간들이 힘들지 않았던 이유는, 아마 애정하는 동행인과 나누는 나들이에 대한 설렘 때문이었을 것이다.
천안에 내려오면 늘 사 먹는 학화 호두과자.
내려오기 전에는 늘 본점에 가 봐야지 다짐하지만, 어째 늘 천안역점만 가게 된다.
이 날도 역시 천안역점에서 간식용 호두과자를 구입하였다.
400번 버스가 오질 않아서 주전부리 생각에 급히 사 갖고 나온 것인데, 하마터면 이 때문에 버스를 놓쳐 버릴 뻔했다.
독립 기념관
천안에 와서 가장 먼저 들른 곳은 할머니 학화 호두과자.
그리고 두 번째로 들른 곳은 여기, 독립 기념관이다.
여담이지만 나는 이곳의 태극기마당을 참 좋아한다.
푸른 하늘에 펄럭이는 태극기 무리는 마음을 웅장하게 한다.
얼마 전 택배로 받은 현충 시설 스탬프북.
2025년 11월 17일까지 즐길 수 있는 이 한정판 스탬프 투어에는, 총 82개의 현충 시설이 참여한다.
독립 기념관도 그중 한 곳.
사실 천안에 온 것은 두 종류의 스탬프북에 도장을 찍기 위함도 있다.
일단은 현충 시설 스탬프북을 펼쳐 스탬프를 찍은 뒤 인증해 본다.
겨레의 탑.
그리고 태극기 마당.
비가 오다 그치다 오락가락하는 날이라, 태극기도 차분한 날이었다.
독립 기념관 고객 지원 센터를 찾아간 뒤, 한국 관광 100선 스탬프 투어 여권을 꺼냈다.
충청권 페이지를 열어 독립 기념관 스탬프 콩.
다른 지역도 어서 도장으로 채우고 싶다.
의욕은 있으나, 문제는 교통이다.
자동차 앞자리를 무서워하는 나는, 아직 면허가 없다.
원래부터 탁 트인 뷰 자체를 무서워하여 그 흔하디 흔한 자전거도 타지 못한다.
케이블카와 놀이공원 기구들은 죽기 전까지 타지 않을 것이며, 회전목마와 대관람차는 내 인생의 가장 익스트림한 도전이다.
(작년에, 삶의 태도를 바꿔 보겠다며 월미도에 가서 혼자 관람차를 탄 적이 있긴 하다.)
과거에 억지로 자동차 앞자리에 앉혀졌다가 차 사고를 수차례 겪은 적이 있다.
운전자의 미숙함 때문이었다.
조수석에 앉은 상태로 차량과 충돌하여, 뇌진탕으로 응급실에 실려가 누워 있었던 적도 있다.
이러한 경험을 가진 내가 면허를 딸 일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 말인즉슨, 수많은 국내 여행지를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다닐 것이라는 이야기.
고로 시간 분배를 잘해야 하는데, 서울 근교만 벗어나도 대중교통에 소비하는 시간이 너무 길어진다.
외딴곳의 여행지는 그야말로 대리만족해야만 하는 상황.
아무튼간에.
독립기념관 야외 전시관도 한 바퀴 둘러본다.
아이들이 흥미를 가질 만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리고 눈에 띈 보물상자.
무언가 기념품이 있을까 살짝 설레는 마음으로 열어본 상자는 이미 텅 비어 있었다.
독립 기념관을 둘러보다가 이러한 포스터를 여러 차례 발견하였다.
안타깝게도 이벤트는 종료된 것인지, 즐길 수 없어 아쉬웠다.
독립 기념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석오 이동녕 선생 생가지가 있다.
현충 시설 스탬프북 기록된 장소.
걸어가기에 위험하지 않은 길인지 궁금한 마음에 고객 지원 센터에 가서 문의해 보았으나, 추천하지 않으셨다.
차를 가지고 가셔야 한다는 말에 조용히 단념.
유관순 열사 기념관으로 향하다
결국 독립기념관 정류장에서 다음 목적지를 위해 400번 버스를 탔다.
정류장에 서는 400번 버스는 두 종류이다.
하나는 병천 방면, 하나는 천안역 방면.
타기 전에 기사님께 방향을 꼭 여쭤 보고 타는 것을 추천한다.
내가 탄 이 버스는 병천행이다.
병천 순대 타운에서 조금 걸어가면 유관순 열사 기념관이 나온다.
이곳 역시 현충 시설 스탬프북에 등록된 곳으로써, 도장을 찍고 한 바퀴 둘러본 뒤 점심으로 순댓국을 먹으면 딱 좋은 코스였다.
스탬프 투어가 아니었더라면, 과연 내가 이곳에 버스를 타고 올 일이 있었을까.
스탬프북을 든 채 꾸며낸 애국심을 가지고 이곳에 찾아온 것만 같아 부끄러웠다.
그리고 이 마음은 어느 가족을 만나면서 약간의 씁쓸함으로 번져 버렸다.
계단에서 마주친 어느 한 부녀.
아이의 아버지가 자신의 딸에게 "너는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칠 수 있어? 바칠 수 있냐고!" 라며 강압적으로 다그치듯 대답을 강요하고 있었다.
물론 그럴 의도는 아니셨을 것이다.
하지만 고작 4~5살 여자 아이의 마음에 애국심이라는 것이 존재할까.
왠지 당시의 내 마음속에 떠오르던 이상적인 부모의 말은
"우리 딸, 어떤 상황이 오든 아빠가 반드시 지켜줄게"였던 것 같다.
추모관에서 잠시 유관순 열사의 초상화를 바라본 뒤, 계단을 통해 찬찬히 내려왔다.
그리고 거하게 미끄러졌다.
산 지 몇 년 된 신발이긴 하지만, 바닥이 나름 튼튼하다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보다.
마음속 생각이 많았던 탓인지 아니면 뭉개진 낙엽이 많았던 탓인지.
예비용으로 늘 들고 다니는 물티슈가 있었기에 다행이었고, 백팩을 메도 될 정도로 수술 상처가 회복이 되어 다행이었다.
백팩을 메고 간 덕에 이 녀석이 뒤통수와 척추를 충격으로부터 고스란히 지켜 주었다.
물론 약간의 멍이 들기는 했지만 이 정도야 뭐.
이 날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트레킹화를 하나 사고야 말겠다는 굳은 결심을 하게 되었다.
병천 순대 타운
본래 나는 순댓국을 먹지 않는 사람이지만, 작년부터 서서히 도전하기 시작했다.
누린 음식을 먹지 못하는 내가 순댓국에 도전했다고 했을 때, 지인 부부는 매우 반가워하며 여러 순댓국 맛집을 알려 주었었다.
그들과 작년 이맘때쯤 함께 왔던 곳이 바로 이곳, 병천 순대 타운이기도 했다.
늘 붉은 다대기가 가득한 매운맛 국밥만 깨작이던 내가, 맑은 순댓국을 먹는 것을 보고 반가워하던 지인의 얼굴이 떠오른다.
"네가 잘 먹는 걸 보니까 뿌듯하다, 여기 오길 잘했네."
내가 먹는 모습에 기뻐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깨달은 날.
다시 찾은 병천 순대 타운.
어딜 가든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맛집이라는 뜻이겠거니.
나도 따라 줄을 섰고, 한 시간 정도 대기한 끝에 입장할 수 있었다.
관광지의 밥집은 나름의 트라우마가 있다 - 혼자라서 거절당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기에.
다행히 이곳에서는 1인 식사도 가능해서 넓은 4인석에 안내를 받았고, 대기줄이 길다는 것을 몸소 체험하고 온 나는, 널찍한 좌석이 부담스러웠다.
1인석... 왜 없나요.
10분 정도 기다리자 나온 순댓국.
통통한 순대 여섯 점과 여러 다양한 모습의 고기들이 들어 있었다.
너무 뜨거운 것을 먹으면 치아의 통증이 심해지기에, 최선을 다해 빠르게 호호 불어가며 식사를 마쳤다.
옆 테이블에 동시에 앉은 나이 든 부부가 나를 흘깃 쳐다보며 '혼자 와서 저렇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며 흉을 보는 것이 들렸는데, 결과적으로는 내가 그들보다 빨리 식사를 마치고 일어났다.
현충사 포기, 빠른 귀가
현충사에 가기 위해 들렀던 종합 터미널 정류장.
이곳에서 버스를 타고 45분 정도 가면 현충사가 나온다.
하지만 공휴일이라 그런지 배차 간격이 길었던 버스로 인하여, 머릿속이 복잡해지며 초조해지기 시작하였다.
저녁 7시에 천안에서 출발하는 무궁화호를 예매해 두었는데 - 이때의 시간은 오후 4시 30분이었다.
버스가 바로 온다고 해도 현충사에 오후 5시 30분 도착...
하지만 안타깝게도 버스는 20분 후 도착 예정이었다.
현충사로 뛰어가서 스탬프만 찍고 바로 내려온다 해도, 버스를 한 대 놓치게 되면 무궁화호까지 놓쳐 버린다.
게다가 다른 열차 역시 매진 삼매경.
고민을 하다가 현충사는 다음으로 미루고, 천안역까지 산책하듯 걸어가기로 했다.
아침에 샀던, 식은 호두과자를 먹으면서.
그러고 보니 천안에서 본 사람들 중 그 누구도 길에서 호두과자를 먹는 이가 없었다.
여행객들만 먹는 걸까.
... 맛있다.
무궁화호에서 부끄러워서 간식 못 먹는다던 사람의, 길거리 호두과자 먹방.
카페에서 잠시 앉아 시간을 보내는데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들었다.
1호선 타고 가도 되는 거였잖아?
현충사... 왜 포기한 걸까.
하지만 어차피 아까 유관순 열사 기념관에서 미끄러진 탓에 발목이 아파 왔다.
결국 집으로 조용히 귀가.
그리고 나는 약간의 부은 발목을 가진 채로 다음 날 궁중 문화 축전 스탬프 투어를 강행하였고, 스포츠용품 가게에서 트레킹화를 하나 샀다.
이 이야기는 다음번 뚜벅이 나들이 이야기에서 풀어볼 예정이다.
나름 거창했다가 미흡하게 끝나버린 천안 여행기는 이것으로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