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가진 보일러
추석 연휴 들어서면서 비가 오기 시작했다.
기온이 뚝 떨어지는 바람에 이제는 찬물로 씻기 서늘하다.
보일러도 추웠는지 정신줄을 놓아 버렸다.
애초에 온수 전용 모드가 제 기능을 못하던 시점에서 이곳으로 이사를 왔었다.
'그래도 난방 모드에서는 뜨거운 물이 나오니까, 아쉬운 대로 써야지.'
하지만 이제는 난방으로 설정한 후 온수를 틀어도 보일러가 작동을 멈춰 버린다.
결국 린나이 A/S 신청을 잡아 두고 임대인의 따님께 보일러 이야기를 문자로 남겨 두었다.
사실 얼마 전 에어컨 실외기 고장 때문에 찾아가서 이야기를 나누었었다.
그때, 사실 보일러도 문제가 있다고 언급하며 겨울 오기 전에 조만간 손을 봐야 할 것 같다고 말해 두기는 했었다.
그 시기가 조금 빨라졌을 뿐.
고령인 임대인 분이 편찮으셔서 병원에 몇 달째 계신다는데, 그래서일까.
잠시 후 온 따님의 답변에 마치 한숨이 붙어 있는 것처럼 느껴져, 마음이 살짝 시큰해져 왔다.
쌉쌀해서 씁쓸한
여하튼 나도 기분 전환이 절실했다.
커피 맛집을 검색해 본 후 결심한 짧은 외출.
아껴서 풀어야지 했던, '당신은 사건 현장에 있습니다'라는 책 한 권과 노트 한 권을 가지고 말이다.
에피소드 3개를 연달아 풀어 보았는데, 추리 결과는 부끄러울 만큼 처참했다.
추리 좋아하는 사람 맞아?
얼마 전 넷플릭스에서 방영했던 '크라임씬 제로'에서는 범인을 잘 맞췄는데, 왠지 이 책이 더 어려운 것 같다.
평소 거의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편이지만 오랜만에 크림라떼를 골랐다.
달아서 끝맛이 쌉쌀했다.
입맛을 다시는 모습이, '쯧' 하며 혀를 차는 것과 비슷해서였을까.
애써 묻어 두었던 씁쓸한 기억이 몰려왔다.
나도 모르게 이를 꽉 다무려는 것을 깨닫고 아차 했다.
'신경 치료 중이니 그러면 안 돼.'
급하게 치아 사이에 끼워 넣은 혀가 욱신거리고 턱이 저릿했다.
곧이어 위산이 올라오며 위장이 시큰해져 왔다.
부를 수 없는 노래
아주 오랜만에, 코인 노래방에 갔다.
얼마만인가 생각해 보니 작년 갑상선암 진단 이후 처음인 듯하다.
벌써 1년 반이 훌쩍 지났구나.
사람이 없을 것 같은 노래방을 찾아, 가장 조용해 보이는 구석방에 자리를 잡았다.
그 덕에 나의 올라가지 않는 목소리가 적나라하게 고막에 꽂히며 울적해졌다.
노래를 잘 부르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고음을 지를 수 있는 노래들은 많이 있었는데.
이제는 정말 기억으로 묻어 두어야 할 것 같다.
결국 노래방에 간 목적은 상실되었고, 점차 노래방 멜로디 감상 모드로 빠져 들었다.
'이제는 노래도 마음껏 못 부르겠군.'
와중에 왠지 미련이 남아, 그나마 부를 수 있는 곡을 찾아 리모컨의 숫자를 바삐 눌러보았다.
아주 저음의 남자 노래는 부를 수 있었다.
다행인가 싶었으나, 금세 비참해졌다.
갑상선암 수술 후 반년 가까이를 마지 심슨의 목소리로 살았다.
지금도 몇 분 이상 말을 하면 목구멍에서 음의 이탈이 발생하곤 한다.
헛기침과 잔기침은 일상이 되었다.
안 그래도 물을 많이 마시는 편이었는데, 더더욱 물을 달고 살게 되었다.
수술 후 했던 음성 검사에서는, 나의 목소리가 정상 범주에 있다고 했는데.
갑상선암 수술을 하고 나서 목소리와 성량의 변화를 겪은 건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지 않을까 했는데, 이제는 좋아하던 취미를 즐기는 것도 힘들겠다는 생각에 살짝 마음이 시큰해져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