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커피 한 잔_티 코스터를 만들며

있잘쓰 모드

by Peach못한
드립커피를 내릴 거예요


아침을 나름 든든히 챙겨 먹고 잠시 멍하니 앉아 있다가 한 가지 생각이 퍼뜩 들었습니다.

'커피 마셔야지.'

왜, 어찌하여, 이다지도 식후 커피는 국룰이란 말입니까.

아니 - 어쩔 때는 아침은 건너뛰더라도 커피는 마셔야 할 때가 있어요.

그래서 커피물을 올립니다.


그러고 보면 커피 취향이 살짝 바뀌었어요.

예전에는 달달한 바닐라 라떼파였지만, 요즘은 드립커피가 좋습니다.

또한 예전에는 캡슐 커피를 10개까지 마셔야 하루 종일 깨 있을 수 있었는데, 요즘은 최대 두 잔을 넘기지 않습니다.

요즘에는 멍하면 그냥 그 멍함을 받아들이려고 하거든요.


커피를 좋아한다 해도 여러 장비가 거창하게 있는 것은 아니고,

과거의 제가 쿠팡에서 사놓은 가성비 분쇄 원두에 뜨거운 물을 부어 내려 먹는 정도입니다.

그래도 나름 린싱(종이 필터에 뜨거운 물을 부어 드리퍼와 밀착시키는 작업)은 하고 있어요.

포트도 하나 있기는 한데, 어째 음식 할 때 물 계량하는 용도로 더 자주 쓰고 있습니다.



위빙을 합니다


위빙.

날실과 씨실을 교차하여 무언가를 짜내는 것.

과거에 아주 잠깐 위빙에 취미를 붙였던 적이 있습니다.

어디까지나 취미였어요, 길게 가지는 못 한 그냥 그런 취미.

팔기는 자괴감 들어 몇 년 간 서랍 한 통에 박아 두기만 했던 여러 다양한 실들.

볼 때마다 마음이 불편했는데, 에라 모르겠다 싶어 꺼냈습니다.

요즘 티코스터가 너무 가지고 싶었거든요.

천을 사서 손바느질을 해 볼까, 하나 살까 한참 고민했습니다만.

있는 거나 잘 쓰자.


얼마 만에 꺼냈는지 모를 위빙틀에는 날실이 여러 겹 두툼이 걸려 있었습니다.

과거의 제가 무언가를 만들려 마음먹었다가, 날실만 걸어두고 관뒀나 봐요.

이런 걸 볼 때면 부끄러워집니다.

아마 얼굴 채도가 살짝은 올라갔을 법한 느낌.

왜 이렇게 날실을 여러 겹 해 놓았는지도 너무 잘 알겠더군요.

직조 끝나고 날실들을 매듭지어 묶을 때마다, 꼭 탈모 온 머리카락을 보는 듯한 - 두어 가닥 달랑거리는 날실이 안쓰러웠던 과거의 제 심정이 떠올랐습니다.

나름 태슬처럼 만들고 싶다고 저렇게 두툼히 걸어 놓은 것 같은데, 과연 그게 생각처럼 될지.


여하튼 과거의 나를 존중하는 마음을 먹으며 그 위에 씨실을 교차하듯 짜내어 봅니다.

너무 팽팽해지진 않았는가 중간중간 체크할 것.

너무 직조에만 심취했다가는 나중에 마름모 모양의 결과물을 보기 십상이거든요.


한 줄이 끝날 때마다 빗을 이용해서 촘촘하게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이런 식으로.


날실이 노란색이어서 그런지, 왠지 라푼젤 머리를 빗겨주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애니메이션 속 라푼젤의 머리 길이는 21m라고 해요.

인터넷에 검색해 보니, 21m 라면 건물 5층에 해당하는 높이.

하루에도 수십 번 그 머리를 빗었을 라푼젤은 과연 근육통으로부터 자유로웠을까.

로프처럼 머리카락을 사용할 때 어깨 관절은 괜찮았을까, 두피 건강은 괜찮았을까.

하루에 트리트먼트는 대체 몇 리터나 써야 했을까.


하루에 빗질로 써야 할 시간을 계산하다 보니, 라푼젤로 안 태어나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찰랑이는 머릿결과 풍성한 숱은 참 부럽습니다.

그러고 보니, 나중에 라푼젤은 숏컷에 가까운 머리를 갖게 되지요.

아마 그 친구 - 다시는 긴 머리로 가지 못할 거라 생각합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자꾸 머리를 짧게 자르게 되더군요, 감고 말리는 시간이 압도적으로 짧아져서 편하거든요.

그리고 머리통의 이 가뿐함, 잃을 수가 없지.


아무튼.

커피를 홀짝이며 취미 생활이라니, 오래간만에 여유로웠어요.

오랜만에 음악도 들었습니다 - 카테고리는 재즈.

연초여서 그런지, 재즈 Top100 리스트 상위권이 거의 크리스마스 노래였습니다.

크리스마스에도 캐럴을 안 들었는데 어쩌다 보니 듣게 되었네요.

이것은 2025년의 크리스마스 캐럴 땜빵인 건지, 아님 2026년의 크리스마스 캐럴을 미리 땡겨 듣는 것인지.


있는 걸 잘 쓰자

있는 걸 잘 쓰자.

이것은 소비를 줄이자는 의미도 되지만, 사실 제 자신에게 하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새해가 된다 해서 새로운 나로 다시 태어날 수는 없다는 것을 이제는 너무 잘 알고 있어요.

고로, 모든 걸 다 청산하고 새 삶을 살 생각은 버리자.

과거의 기억을 양분 삼아 품어 보자.

있는 나를 잘 활용해서 남은 삶을 덜 후회하게끔 살아 보자.

그게 2026년 제 한 해의 목표입니다.


그래서 저를 하나하나 떼어 놓고 분석 중에 있습니다.

과연 이 요소 중, 오래 써먹을 만한 것이 무엇이 있을까 말이에요.


지난 일은 적당히 매듭도 짓고.


얼추 생각한 높이만큼 만들어졌어요.

매듭짓는 과정까지 거치고 적당량 실을 남겨 두고 잘라내면 세상에 하나뿐인, 하지만 돈 주고는 굳이 안 살 것 같은 티코스터가 완성되는 것입니다.

과거에 비루한 실력으로 티코스터 만들어서 지인들에게 선물도 했는데.

기쁘게 받아 주셨던 분들께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드리고 싶어 지네요.


나름 폭신합니다.

이것으로 인해 이케아에서 공수해 온 머그컵의 엉덩이가 조금은 따셔지겠지요.

우리 집에서 일하는 대가로 제공하는 복지 - 머그컵 전용 엉덩이 방석.

나중에 하나 더 만들어 보는 것으로 해야겠습니다.

물론 이 친구가 좋아해 준다면요.


그러고 보니, 핸드메이드 라벨을 하나 달아 주면 꽤 괜찮을 것 같습니다.

이로서 연희동 바늘이야기 샵을 한 번 더 갈 핑계도 획득하게 되는군요.

나중에 가야지.


썩 아름답지 않은 마무리와 함께.


분명 처음에는 따뜻한 커피를 홀짝이며 티 코스터를 만들 생각이었는데, 정작 저에게 남은 것은 다 식어 버린 아이스커피도 아닌 무언가 한 잔.

어떻게 생각하면 이게 뜨거운 커피의 매력일 수도 있지요.

뜨뜻함과 미적지근함, 시원함까지 고루 느낄 수 있는.

아닌가.

여러분들은 식은 커피, 드시나요 버리시나요.

저는 그냥 원샷 때립니다.


이렇게 아침의 커피 타임이 마무리되었네요.

오후에는 숙면을 위해 커피보다는 차 종류를 마셔 보려 합니다.

그럼, 여러분 오늘도 기분 좋은 하루 보내세요.


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