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에서 시작한 포항 당일치기
포항에 갈 결심
때는 바야흐로 11월의 중순.
전날 잠을 살짝 설친 나는, 이미 외우다시피 했던 캘린더와 다이어리를 열어 보았다.
나는 11월의 닷새 동안 경주에 있었다.
그리고 나름 빡센 치밀한 계획을 짜 놓았었다.
하지만 내가 간과한 것이 있었으니 - 컨디션.
나는 당시의 컨디션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 날은 경주 여행의 셋째 날.
이러다 5일 내내 누워만 있게 생겼기에, 그리고 경주 여행에서 무언가를 하나 얻어 가고는 싶었기에.
경주에서 비교적 가까운 포항을 당일치기로 다녀오기로 했다.
사실 원래 계획했던 곳이기는 하다 - 다만 갈 자신이 없었을 뿐.
눈을 떴는데 내 집이 아닌 환경에, 1초 정도 어깨가 귀 쪽으로 5센티 정도 치켜 올라갔었다.
한 공간에 익숙해지려면 다소 시간이 걸리는 나는, 이래서 3박 이상의 여행을 선호한다 - 숙소 하나에 익숙해지려면 사흘은 족히 걸리기 때문.
예전에는 10일 넘는 여행 동안 하나의 숙소에만 머문 적도 있었지 아마.
전날 저녁에 마트에서 산 하드 3개를 먹고 잠이 들어서, 열기는 살짝 내려가 있었던 다소 차분한 아침.
호텔 사장님께 아침 인사를 건네며 여쭈어 보았다.
"사장님, 여기서 대중교통으로 호미곶 가시는 분들도 계세요?"
"아유, 많죠."
사장님께서는 손짓으로 근처 시외버스 터미널을 묘사하시며, 거기서 시외버스를 타고 포항에 내린 후 시내버스를 타고 가는 방법을 제안해 주셨다.
아마 당시의 나는 사장님의 입에서 나올 "아유, 힘들죠."라는 말을 원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충분히 갈 수 있다는 것이 사장님의 대답은 나의 기대감을 모조리 훑어 수거해 가셨다.
'가도 되고 안 가도 되지.'
결국 나는 이 말을 주문처럼 외우며 경주 버스 터미널로 찬찬히 향했다.
경주에서 포항 터미널까지 편도 4,200원.
탑승 시간이 표시되어 있지 않아 살짝 당황했으나, 아무 거나 타도 된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이런 자율성이...?
터미널 내의 마트에서 오렌지 주스 한 병이랑 츄파춥스 하나를 사서 나오려니, 내가 타는 것을 승낙할 법한 버스 한 대가 찬찬히 다가오고 있었다.
뭔가 초점이 조금 이상하지만 한 컷.
굳이 안 가도 된다는 말을 인생의 격언처럼 내뱉으면서도, 내 발은 자동적으로 버스 입구 쪽으로 찬찬히 향하고 있었다.
아침 시간이기에 버스에서 주무시는 분들도 계셨고, 그래서인지 버스의 모든 좌석은 곧 커튼이 쳐졌다.
나도 조용히 앉아서 이미 알고 있는 캘린더를 다시 체크하고, 챙겼음을 이미 알고 있는 스탬프 여권을 다시 한번 가방을 열어 살펴보았다.
버스를 기다리기
경주와 포항의 시간적 거리는 대략 30분.
30분이라는 시간은 평소 뚜벅이 여행을 할 때 지하철 3개 역 정도를 걸어갈 시간.
그냥, 무언가 굉장히 신기했는데 이 신기함이 대체 무엇인지 정의 내릴 수가 없었던 것 같다.
당시의 나는 무언가에 조금 홀려 있었다.
포스코 글자를 보며 시내버스 안에서 연신 바깥 풍경을 찍어 댔던, 누가 봐도 관광객이었던 1명.
버스를 타고 30분 정도 가다가 중간에 다른 버스를 갈아타기 위해 내렸다.
내가 타야 할 버스는 9000번.
배차 간격은 44분.
그리고, 근처 편의점에서 간식이라도 먹어야겠다는 다짐이 사르륵 기화되어 날아가 버리게 만든 허허벌판.
'어, 나 뭐 하지?'
그때, 맞은편에 서 계시던 할머님께서 나에게 손짓을 하며 건너오라 하셨다.
"거기서 타면 공항 한 바퀴 돌고 나와야 돼서 길어! 여기서 타요!"
초면인 할머님의 말씀이 귓가에 선명히 꽂히는 것을 느끼며, 단거리 주자 마냥 빠르게 뛰어 횡단보도를 건너고 차도를 건너 맞은편으로 넘어갔다.
내가 횡단보도를 건너는 사이에 할머님 곁에는 할아버님 한 분께서 와서 서 계셨다.
"9000번이 한 대가 아닌데, 호미곶 가는 것은 하단이 특이하게 생겼다고. 그걸 타야 돼요. 그리고, 타기 전에 반드시 호미곶 가느냐고 물어보고 타요. 안 그러면 엉뚱한 데 간다고."
손짓으로 내가 타야 할 9000번 버스의 인상착의(?)를 상세히 알려 주신 두 분은 손을 잡고 정류장을 떠나셨다.
아마 주변을 살피던 모습에서 여행객의 티가 너무도 많이 났던 걸까.
도와줘야겠다 마음먹고 그분들이 정류장 앞에 일부러 서 계셨다는 느낌을 받았던 순간이었다.
아침의 호텔 사장님과의 대화.
그리고 할아버님 할머님과의 짧은 대화.
세상과 연결된 실오라기가 느껴지며, 고치처럼 단단히 조여 있던 마음이 살짝 찢어지려는 듯 명치가 시큰해져 왔었다.
30분 정도 더 기다리는 동안 원 없이 구경한 하늘.
정말 푸르고 파랗고 상쾌하고.
좋은 표현, 네가 다 가지렴 하늘아.
'호미곶을 가면, 어쩌면 살짝 이른 점심을 첫 끼니로 먹을 수도 있겠다.'
상생의 손 조우
버스에 타고나서 들었던 생각.
'아, 우측에 앉을 걸.'
버스의 오른쪽 좌석에서는 바다 풍경이 끊임없이, 무한 리필 되고 있었다.
어쩐지 다른 분들도 다 오른쪽에 앉아 계시더라니.
호시탐탐 노리던 오른쪽 자리에 타고 계시던 승객 한 분이 내려서, 잽싸게 창가 자리로 이동했다.
버스에서 찍은 바다 사진은 거의 다 흔들려 실패해 버렸다.
사실 중간에는 멀미가 나서 핸드폰은 잠시 닫아 두고 창가에 기대어 바다를 구경했다.
하늘도 파랗고 바다도 파랗고 지붕도 파랗고.
'파란 나라를 보았니'로 시작하는 동요가 머릿속에 자동으로 재생되던 순간.
그 파란 나라가 이 파란 나라는 아닐 텐데, 아무튼.
중간에 잠시 다른 생각에 빠지느라 한 정거장 지나쳐 내렸지만, 별 어려움 없이 도착한 호미곶 마을.
저 너머에는 내가 꼭 보고 싶었던, 상생의 손이 있었다.
그리고 호미곶에 온 후에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 상생의 손은 본래 두 개였다는 것을.
하나는 호미곶 광장에, 하나는 바다에.
그렇게 보고 싶었던, 상생의 손 바다 버전.
손가락 위에 갈매기들이 잠시 앉아 있던 순간도 있었으나 핸드폰에 온전히 담지는 못하였다.
파도가 철썩이는 바다는 꽤 강렬했고, 후련했다.
그리고 문득 든 생각 하나.
'상생의 손은 파도에 멍이 들어서 저렇게 파란 손을 갖게 된 것일까.'
청동으로 제작되어 그런 것은 알고 있지만 그것치고 너무 파랗게 질려 보였었달까.
받은 지 좀 되었지만 도통 찍을 일이 없었던 등대여권도 이 날 챙겨 갔었는데, 개봉 박두 스탬프는 처참하게 망해서 스탬프 두 개를 겹쳐 찍게 되었다.
어차피 내 건데 뭐.
괜찮다.
등대 박물관에서 음료 한 잔
돌문어 짬뽕이 먹고 싶었지만 가격 앞에서 급격히 T가 된 나는, 일반 짬뽕을 하나 시켜서 먹었다.
일반 짬뽕도 굉장히 양이 많아 거의 절반은 남기고 나왔다.
식후 달달한 믹스 커피 한 잔을 들고 상생의 손을 다시 구경하고, 파도 동영상도 담아 보고.
나에게 사진 촬영용 토퍼를 만들어 주신 지인 분께, 그에 대한 보답으로 상생의 손 사진이랑 바다 영상도 보내 드렸더랬다.
또 다른 목적지였던 국립 등대 박물관.
국내 유일의 등대 박물관인 이곳은, 볼거리가 풍부한데 입장료가 무료인 아주 감사한 곳이었다.
둘러보는 동안 내가 가장 좋아하던 동화책인 어린 왕자가 재생되었던 곳.
끊임없이 가로등을 켰다 끄는 점등원은 어린 시절 나에게 등대를 떠오르게 했었다.
푸른색 자유로운 바다, 그곳의 등대를 켰다 끄는 등대지기.
검은 공허한 우주, 그곳의 한 행성에서 가로등을 켰다 끄는 점등원.
여행객이 길을 잃지 않게, 바다에서 길을 잃지 않게 선의를 베푸는 사람.
나는 그 에피소드가 참 좋았더랬다.
등대 박물관 2층에서 바다를 보며 음료를 마실 수 있다기에 카페테리아로 향했다.
커피를 마실까 하다가, 이미 식후에 믹스 커피를 마셔 버렸기에 대안으로 택한 유자에이드.
바다를 실컷 봤다 해도, 바다를 위에서 바라보며 마시는 음료는 또 다른 거니까.
냉장고에 붙여 둘 기념 마그넷도 샀다.
가슴에 울림이 있는 장소를 방문한 뒤 마그넷을 사는 것은 나름 괜찮은 소비인 것 같다.
내가 여기에 다녀왔다는 좋은 증거.
다시, 경주로
살짝 이른 듯싶었지만 머릿속으로 버스 시간을 생각해 보니 이른 것이 아닌 오후 시간.
9000번 버스를 기다리며 글의 소재도 정리하고, 초안도 써내려 갔다.
버스를 타기 전 잠시 걸었던 포항 철길숲.
쭉 뻗은 철길, 그리고 햇빛을 받아 반짝이던 풀들은 마치 대낮의 반딧불 같았다.
이 길을 걸으며, 나는 마음속 응어리진 무언가 하나를 풀어내었다.
그리고 깨달은 것이 하나 있었으니,
슬픔이라는 이 감정도 때로는 소중하다는 것.
4,200원을 내고 다시 경주로 향한다.
공허했던 스펀지 같은 심장은, 분홍빛 하늘을 흡수하여 살짝 몽글해졌다.
터미널에서 내린 후 왠지 밥을 챙겨 먹고 싶은 마음이 들었고, 그 마음이 반가웠던 터라 곧바로 황리단길로 향했다.
저녁 식사는 우엉이 올라간 김밥.
이 날, 당일치기를 마쳤는데 휴식을 취하는 곳이 집이 아니라는 것이 신기했다.
그리고 푸른색 자연을 마음껏 볼 수 있어 후련했다.
사람이 고팠던 이 날, 잠시 나는 현실을 손에 놓았었지만 사람과의 연결은 놓지 않았었다.
머릿속의 여러 사람들을 떠올려 보며 - 거미줄처럼 얇은 네트워크이지만 무사히 유지되고 있음에 감사했던 경주에서의 포항 당일치기 여행.
이렇게 마무리되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