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쓴 선크림
아침마다 마른침을 삼킨다.
아니, 사실 삼킬 마른침이 없다.
나는 한껏 부풀린 몸에
그렇지 못한 속내를 가진 채
이 공간에 놓여 있다.
아.
아침이 와 버렸다.
샤워를 마친 저 사람은 내 앞에 털썩 주저앉는다.
화장솜을 꺼내 스킨을 묻혀 닦는다.
그다음은 에센스.
에센스 저 친구는 최선을 다해 미약한 광채를 마른 피부에 선사한다.
... 꼴깍.
내 차례다.
툭.
툭.
"아, 다 썼네."
나에게 다시 모자를 씌운다.
끝이면 참 좋겠지만 불행히도 세상 일은 내 맘 같지 않다.
마치 탈곡기처럼 탈탈 털리는 의식이 시작된다.
나는 오늘도 타의적 헤드뱅잉을 하는 락커가 된다.
빼앗기 위해 - 그리고 지키기 위해.
"아, 됐다. 나온다."
결국 최후의 선크림을 빼앗기고 난 뒤, 어질 어질 화장대 위로 복귀한다.
뒤에 서 있던 스킨이 수고했다며 약간의 물기를 나눠 준다.
거울은 나의 안색이 안 좋다며, 내 모습을 걱정스러운 듯 비춰준다.
음.
내가 봐도 하얗게 질렸다.
저 자는 내 속을 알기나 하는지.
얼굴에 파우더까지 퐁퐁 두들긴 채 외출한다.
에센스가 조용히 말을 건넨다.
"그래도 넌 양반이야. 지난번 분홍 피부가 예쁘던 그 애는, 몸이 두 동강 나 버렸지 뭐야."
"맞아, 아깝다는 이유로 그 지경을 만들어! 그게 할 짓이야?"
스킨이 울분을 토해 낸다.
휘청.
앞이 핑 돈다.
아뿔싸, 그게 나의 미래일 수도 있겠구나.
나는 사실 이곳이 참 좋았다.
살짝 호감이 가는 상대인, 에센스도 있었다.
좀 더 오래 머물고 싶었는데.
저 사람이 외출을 안 하면 난 좀 더 오래 살 텐데.
내 안에 남은 게 별로 없음을 눈치채면 난 두 동강 날 것이다.
화장품들의 도피처가 어딘가에 있다고 들었다.
지금이 타이밍이다.
잊히기 위해, 나중에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기 위해 나는 피난할 채비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