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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나현 Aug 07. 2024

당신은 정치적인 사람입니까

비틀린 질서가 정상처럼 보이게끔 거대한 술수와 음모가 작동하는 세계에서

직장에서 제공하는 숙박시설로 짧은 여름휴가를 떠났다. 막상 가보니 첩첩산중에 있는 숙소였다. 대체 이런 울창한 산속에 대규모 리조트가 어떻게 건설 허가를 받았을까. 자연환경을 최대한 보존하며 개발했다는 홍보 문구가 오히려 자연 파괴를 자행했다는 변명처럼 느껴졌다. 리조트가 생기면 관광객이 찾아오고, 덩달아 지역 상권도 부흥할 거라는 명분을 내세웠을까. 하지만 나 같은 게으른 관광객은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않고 리조트 안에서 돈과 시간을 흘려보낸다. 검은 그림자마저 살아있는 것 같은 짙푸른 나무가 빽빽하게 심어진 산을 보면서. 시중가보다 1.5배는 비싼 리조트 내부에 식당 메뉴를 살피면서. 그리고 유행이 지난 영화를 보면서.


영화는 서울의 봄이었다. 지난해 말 개봉해 천만 관객을 모은 유명한 영화지만, 나만 늑장을 부리고 이제야 봤다. 1979년 12월 12일 군사 반란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의 결말은 답답했다. 30m 넘게 자란 나무로 울창한 숲속에서 길을 잃었는데 눈앞에는 뿌연 안개만 보이고 발목은 진창에 빠진 기분이랄까. 아, 휴가지에서는 쏟아지는 폭포 같은 시원하고 청량한 영화를 봤어야 하는데. 나와 남편은 영화가 끝나고도 계속 체한 기분이 들어 가슴을 쳐댔다.


영화 속 유난히 내 마음을 붙드는 대사가 있었다. 대통령 시해 사건으로 뒤숭숭한 시기, 계엄사령관을 맡은 육군참모총장은 사조직을 만들어 세력을 확장하는 보안사령관 전두광을 경계하고자 한다. 그래서 이태신에게 수도경비사령관을 제안한다. 총장은 그에 대해 이렇게 평가한다. “정치는 아예 신경끄고 사는 진짜 군인이라고.”


내 의문은 ‘위계적인 조직에서 정치에 신경끄고 일한다는 게 과연 가능할까’였다. 이태신은 말단 병사도 아니고 조직에서 지휘명령을 내리는 간부급 위치에 있다. 조직의 문제를 통찰할 줄 알기에 보안사의 기능을 축소해야 한다는 논문까지 썼다. 조직이라는 장기판에서 이기기 위해서 어떤 말을 놓아야 할지 판단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참모총장의 말로 쓰인다는 것을 안다. 자기 영역 밖을 탐하는 부하 직원을 제압하기 위한 수단. 처음에는 자리를 거절하지만 전두광의 폭주를 보고 가만있을 수 없어 제안을 수락한다. 빌런의 대항마로서 쓰이겠다는 것 자체가 이미 정치적인 것 아닌가.


남편은 이 문제를 논하려면 ‘정치란 무엇인가’부터 정의 내려야 한다고 말했다. 정치를 한다는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넘어 외압을 가하는 행위로 정의하고, 이태신은 자기 역할에 충실한 사람, 전두광은 정치적인 사람으로 나뉠 수 있다는 것이다. 국방부 장관에게 뇌물을 주고 대통령의 인가를 강요하는 것처럼 자기 멋대로 사람을 휘두르는 일이 정치적이라고. 영화 속 대사도 이런 의도로 사용한 것이라는 데 나 역시 동의한다. 다만 내 질문은 “조직에 속해 일하는 사람이 모두 정치적이다”라는 전제를 확장한 것이다.


정치라고 하면 대통령, 야당과 야당의 국회의원, 그 밖에 정치인들의 싸움박질 이야기만 나오니 “난 정치에 관심이 없어” “난 정치와 무관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정치는 나랏일에 국한되지 않는다. 혼자서 살아갈 수 없는 인간의 삶에 정치는 숨 쉬는 일만큼 자연스럽게 녹아있다. 크든 작든 모든 조직은 정치의 산물이다. 이득을 창출하기 위해 사람들이 모였고, 목표를 위해 인력과 자원을 움직이고, 조직원은 성과를 나눈다. 개개인의 입장에서는 조직 내에서 어떻게 해야 인정받을 수 있고, 누구에게 잘 보일 필요가 있고, 유능하다고 인정받을지 고민하고 분투한다. 누군가는 일로 정면 승부하고 누군가는 옆구리를 찔러 공략한다. 이 정치적 과정에 조금이라도 노출이 안 된 순수한 개인이 있다면 갓 입사한 사회초년생 정도 아닐까. 조직문화에 때가 탄 사람들이 요즘 것들이 개인주의적이라고 비난하는 건 그들이 가장 덜 정치적인 상태라 그런 거 아닐까 짐작해 본다.


나는 어떤가. 어디보다 위계적인 조직에서 일하고 있지만, 나는 할 말은 해야 하고 주관이 뚜렷한 편이다. 쉽게 말해 위아래가 없는(?) 스타일이다. ‘상사 간 보는 얘’라는 말을 듣기도 했는데, 연륜과 경험으로 문제 해결 능력을 보여주면 상사로서 존경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저 사람은 왜 저 자리에 있는지 끊임없이 의심하기 때문이다. 아랫사람이 일 못 하는 것도 봐주지 않는다. 네 몫의 일을 해야 동등한 직원으로서 인정한다. 이러니 타인에게 빈말하는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어쩌면 내가 이렇게 눈치보지 않고 사는 건 성격보다는 욕망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이 조직 내에서 성과를 내서 승진하겠다는 생각도 없고 여기에 영원히 일하겠다는 마음도 없다.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나는 그런 면에서 아주 비정치적 사람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아주 정치적이다. 거대한 조직의 기능과 업무를 관찰하고 내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일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지금의 부서장은 나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어, 나를 대체 불가능한 인력이라 칭찬하며 자발적으로 일하도록 격려한다. 나는 부서장의 취향을 간파하고 그녀가 좋아할 만한 성과물을 만들어 낸다. 조직에서 내 성과는 당연히 나만의 것이 아닌, 부서와 부서장의 것이 된다. 유능한 직원을 데리고 있다는 건 곧, 그 부서장이 조직에서 인정받는 밑바탕이 된다. 정치를 서로의 목적을 위해 다양한 수단을 동원해 모두가 만족하는 하나의 질서를 만드는 활동이라고 정의한다면 나 역시 이태신처럼 부서장의 자원이자 무기가 되어 우리만의 정의로운 공간을 만든다. 하지만 누군가는 이 공간을 시기하며 뒷담화를 시작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숙소의 통창 앞에 선다. 산의 곡선을 그대로 담은 풍경에 내 모습이 비친다. 나는 뒷짐을 지고 서성이고 있다.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할 때면 나오는 행동이다. 문득 두 가지 장면이 오버랩된다. 먼저, 24살 교생 실습을 하고 있는 나. 발표 수업 때 교감 선생님은 수업을 잘했다는 칭찬 끝에 내 뒷짐을 지적했다. 실습하는 아이들을 봐주면서 교실 여기저기를 걸어 다녔는데 그는 뒷짐을 지고 걷는 게 젊은 교사답지 않다고 혀를 찼다. 다른 하나는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후 신입 직원과 함께 걷는 나. 아무것도 모르는 그 애를 전적으로 맡아 가르치면서 자주 붙어 다녔다. 점심을 먹고 산책을 하고 돌아온 날이었다. 사무실로 돌아오는 우리 모습을 본 직원이 나에게 귀띔했다. 뒷짐을 지고 여유롭게 걷는 내 뒤로 그 애가 어깨를 모으고 손을 공손히 모은 채 종종걸음으로 걸었다고. 애한테 살살해. 너무 잡는 거 아냐. 좀 억울했다. 잘해준다고 신경 썼는데 그 애한테 나는 어려울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게. 예전에는 뒷짐 진 행동을 의식할 때마다 그 교감 선생님의 훈수를 떠올리며 코웃음을 쳤는데, 이제 그 직원을 떠올리며 슬며시 팔을 앞으로 옮긴다.


시선이 창밖의 수영장으로 옮겨간다. 이 깊은 산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은 작은 수영장에 다닥다닥 모여있다. 발장구 몇 번 하면 옆에 사람을 칠 지경이라 그저 한 자리씩 차지하고 떠 있는 게 최선인 곳이다. 나도 어제 저기서 어떻게든 물놀이를 해보겠다고 바둥거렸지. 물속에서 강남역 저리 갈 인파를 체험하고 금세 기가 빨려 허둥지둥 나와 버렸지만. 문득 모든 것이 맞지 않는 자리에 있다는 걸 느꼈다. 상황에서 한 발 떨어지기 위한 나만의 오래된 습관인 뒷짐은 자주 오역됐다. 이 거대한 시멘트 건물도, 수영장도, 영화 속 전두광도, 이태신도, 조직에서 이중적인 잣대로 일하는 나도 모두 어긋난 자리에서 거대한 오해로 뭉뚱그려졌다. 하지만 계속 뒷짐을 지고 있을 순 없다. 손을 풀고 길게 기지개를 켰다. 이제 휴가는 끝났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 비틀린 질서가 정상처럼 보이게끔 거대한 술수와 음모가 작동하는 그곳으로. 속는 걸 알면서도 패배할 걸 알면서도, 혼돈 속에서 있는 힘껏 소신껏 살아보겠다는 내 의지야말로 가장 정치적인 행동이라 믿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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