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나현 Aug 20. 2020

엄마의 싱거운 밥상

 내 기억 속에 엄마는 음식 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5학년 때 아파트에 사는 친구의 생일 파티에 갔다가 함박스테이크라는 걸 처음 먹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는 그런 음식은 처음 먹어본다고 정말 맛있었다고 부러워하자 우리 엄마가 그랬다. “엄마는 그런 거 못해. 그러니까 엄마한테 너무 기대하지 마.”      


 본인이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정확하게 인지한 이렇게 쿨한 엄마 덕분에 난 엄마가 해주는 건 아무거나 잘 먹는 딸이 되었다. 매번 자기는 요리하는 게 체질에 안 맞는다면서, 그래서 신메뉴 개발엔 전혀 뜻이 없는 엄마였지만 그래도 자신이 할 수 있는 메뉴를 꾸준히 요리해 식구들을 거둬 먹였다. 잘 못하지만 열심히 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했다. 얼마나 열심이었냐면 쌀가마니 들다 한번 삐끗하면서 고질병이 된 허리병이 도지는 날이면 허리 압박 밴드를 질끈 동여매고 비뚜룸한 자세로 아침밥을 지을 정도였다. 그 정도 되면 그냥 식구들한테 알아서 해 먹으라거나 밖에서 먹으라고 해도 됐을 텐데 말이다. 엄마가 그러고 밥을 짓는 걸 본 날, 제발 그러지 좀 말라고 짜증을 내니까 “내가 할 만하니까 한다!”며 상황을 일축해 버렸다. 자기 몸이 아파도 식구들 밥은 꼭 해서 먹이겠다는 건 고집인지 관성인건지 모르겠다. 결국 아침밥을 짓다가 싱크대 앞에서 쓰러지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엄마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하고 있던 저혈압이었다. 그런 안 좋은 컨디션으로 새벽에 쌀을 씻겠다고 힘들게 몸을 일으켰을 엄마를 생각하니 식구의 끼니를 챙겨야 한다는 엄마의 의지는 흡사 결기에 가깝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래서 더 미안하고 고맙다. 잘 하지 못하는 일이지만 열심히 하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어렸을 땐 엄마의 음식이 싱겁고 간이 덜 됐다는 걸 몰랐다. 대학에 들어가면서 엄마 밥상에서 벗어나면서 바깥세상 음식이 우리집과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달고 짜고 매웠다. 집 밖의 사람들은 고기 먹는 방법도 우리 집과 달랐다. 우리 집에서 고기는 밥과 같이 먹는 반찬의 하나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일단 고기로 배를 두둑하게 채운 다음 후식으로 된장찌개와 냉면을 먹었다. 처음으로 밥 없이 고기만 먹으려니 오히려 고기가 잘 넘어가지 않아 공기밥을 추가했더니 같이 먹던 사람들이 얘가 고기 먹을 줄 모른다며 놀려댔다. 사람들은 다양한 소스를 즐겨 먹었다. 새우튀김에는 간장이나 타르타르소스, 장떡에는 간장이나 고추장 등 음식에 무언가를 찍어 먹는 걸 좋아하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우리 집은 그런 음식을 소스 없이 그냥 먹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 음식이 한식이든 양식이든 나는 음식 분야에서만큼은 세련되지 못하고 덜 떨어진다는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왜 음식도 먹어본 사람이 먹을 줄 안다고, 내 앞에 랍스터가 있는데도 어떻게 먹는 줄 몰라 상대방을 멀뚱멀뚱 바라보던 심정, 내 앞에 놓인 다양한 식기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 막막한 심정이었다. 20대의 철없는 나에게 세상은, 어쩌면 엄마의 음식을 벗어나 새로운 음식을 먹는 방법을 배워야 하는 곳이었을지도 모른다.      


 중학생 무렵 어린 나이에 고향에서 서울로 상경해 언니오빠와 살아야 했던 막내딸 엄마는 자기 엄마 옆에서 음식을 배울 틈이 없었을 것이다. 다리를 다친 외할아버지는 집에만 누워 계셨고 외할머니 혼자서 농사일과 집안일을 하면서 어린 자식들을 키워 내야 했고, 상경한 언니오빠들이 아랫동생들을 거둬야 했다. 엄마는 낯선 도시에서 20대 초반에 아빠를 만나 결혼하고 호랑이 같은 시어머니에게 혼나가면서 음식을 배웠을 것이다. 엄마에게 음식을 한다는 건 어쩌면 고된 시집살이의 시작 아니었을까. 아무리 열심히 음식을 해가도 이게 뭐냐고 날벼락 같은 호통을 치는 시어머니 앞에서 엄마는 그 꾸중과 역성을 다 받아낸 착한 며느리였을 것이다. 엄마는 천성적으로 소화 기능이 약해 센 간을 좋아하지 않아 음식 간을 약하게 했겠지만 아마 먹어본 음식의 스펙트럼이 넓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들이 어렸을 때는 아빠 공장에 나가서 부족한 일손을 도와야 했고 퇴근하고 돌아와서 어린 새끼들을 거둬 먹어야 했으니 새로운 것을 경험해볼 시간도 없이 젊은 시절이 훌쩍 지났을 것이다. 게다가 아빠가 한 번 사업 부도를 내고 가족들이 쫓겨 다니다가 집안이 다시 일어나기까지 우리 가족은 꽤 오랫동안 가난하게 지내야 했다. 그러니 바깥 음식을 먹을 줄도 몰랐고 새로운 음식을 해 볼 생각도 못해봤던 것 아닐까. 딸이 함박 스테이크를 직접 만들어 주는 다른 엄마를 부러워했을 때 못하는 걸 해보려고 아등바등하는 것보다 본인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걸 해주는 게 더 낫다고 판단했을지도 모른다.     


 그런 엄마는 나에게 무언가를 강요한 적이 없었다. 내가 중고등학교 때 밤을 새가면서 시험공부를 할 때도, 내가 소설가가 될 거라면서 돈 안 되는 국문과를 선택할 때도, 휴학하고 돈을 모아서 어학연수를 간다 했을 때도, 교사 임용 고시에 몇 번이고 떨어질 때도, 결국 임용 고시를 포기할 때도, 여러 차례 이직을 할 때도, 여러 남자 친구를 사귀어도, 결혼을 한다고 했을 때도,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했을 때도, 엄마는 언제나 내 의견을 따라줬다. 물론 반대한 적도 있고 본인 의견을 내기고 했다. 하지만 엄마의 의견에 내가 이러저러해서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고 반박을 하면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엄마가 잘 배우고 세련되지 못해서 미안해. 그래서 너에게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말하면서 앞길을 열어줄 수는 없을 거 같아. 엄마가 아무리 뭐라고 잔소리를 해도 너는 결국 내가 선택한 대로 할 거야. 그치?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엄마는 항상 너를 믿는다는 거야. 우리 딸이 행복하면 그걸로 끝이야.  


 엄마의 응원은 엄마의 음식과 닮아 있었다. 언제나 나를 조용하게 지지해준 사람. 특출나게 센 간처럼 자극적이고 새롭진 않지만 말없이 나를 먹여 살린 엄마의 음식처럼 말이다. 엄마의 세계는 투박했지만 밀도 있게 안정적이었다. 항상 그 자리에 있는 나무처럼. 그 나무는 이제 내 마음 속에 굳건한 거목으로 자라 있다. 그리하여 나는 어디 가서도 쉽게 흔들리지 않고 나만의 세계를 펼쳐 나갈 수 있었다.        


 잘하지 못해도 계속 반복하면 그래도 실력이 는다는데 엄마의 음식은 어째 항상 제자리다. 어쩌면 그 약간 간이 덜 된 거 같은 일관성 있는 맛이 엄마 음식의 완성형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결혼하고 엄마의 떨어져 살아보니 때론 그 맛이 사무치게 그리운 걸 보니 나는 천생 엄마 딸인가 보다.      


 “엄마, 그렇게 음식 하는 게 싫으면서도 어떻게 그렇게 매일 식구들을 챙겨 먹였어?”

 “그런 바보 같은 질문이 어딨니? 내가 당연히 해야 하는 거니까 한 거지.”

매거진의 이전글 어느 뒹크로운 주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