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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나현 Feb 21. 2021

갑자기 배우자에게 사랑한다는 문자를 받는다면

당황하셨어요?

별다른 일 없는 주말 오전, 컴퓨터 앞에서 예능 프로그램을 보고 있던 남편이 갑자기 숨 넘어갈 듯 웃는다.

“하하하하하하핫, 하하하하하핫”

아니 대체 뭐 재밌는 걸 보기에 저렇게 온몸으로 웃는 걸까.


“글쎄, 이만기가 아내한테 '보고 싶다'라고 문자를 보냈는데, 아내가 쓴 답변이 너무 웃겨서. 메시지 잘못 보냈습니다, 이렇게 답문이 와버렸어.     

<뭉쳐야 찬다> 화면 캡처


그러니까 ‘뭉쳐야 찬다’라는 예능프로그램에서 출연진들이 게임을 했는데, 중년의 아저씨들이 아내에게 ‘보고 싶다’라는 문자를 보낸 후에 가장 먼저 사랑한다는 말을 듣는 사람이 이기는 게임이었다. 하지만 이 게임의 관전 포인트는 남편의 갑작스러운 말에 당황한 아내들의 답변이었다. 남편의 뜬금없는 고백에 ‘잘못 보냈다’라고 이모티콘 하나 없는, 무심하게 낯선 타인에게 보낸 듯한, 딱딱한 기계음이 음성지원될 것 같은 메시지에 모든 출연진이 박장대소하고 말았다. 그 뒤에 그 아내분께서는 “어쩌누, 많이 보고 싶어서.”라고 남편을 우쭈쭈 해주긴 했다. 아무래도 남편의 장난 같은 문자에 장난으로 대응했던 것 같은데, 오래 함께 지낸 부부의 내공이란 이런 건가 싶기도 했다.       


점심을 함께 먹으면서 남편한테 ‘사랑한다’라는 문자를 받는다고 상상해봤다. 나는 뭐라고 대답할까. 그런데 선뜻 사랑한다고 대답하지 못할 거 같았다.

“오빠, 근데 나도 갑자기 당신한테 사랑한다는 문자를 받으면 엄청 당황스러울 거 같긴 해.”
“그래?”
“응 너무 뜬금없잖아. 아무 맥락도 없이, 사랑한다, 이런 문자. 무슨 일 있나 걱정부터 될 거 같아.”
“뭐, 그런 거야? 갑자기 버스 사고가 났고, 전복된 차 안에 갇힌 남편이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아내에게 보내는 문자, 그런 거?”
“응, 뭐 그런 무서운 상황이 아니더라도. 무슨 나쁜 일 생겼나, 아니면 나 몰래 뭐 사고 쳤나, 왜 이런 식으로 걱정부터 될 것 같지? 옛날엔 안 그랬는데. 이제 우린 달달한 신혼이 아닌 거야?”
“아니야, 충분히 일리 있는 생각이야. 나도 갑자기 당신한테 그런 문자 받으면 당황할 수도 있겠어.”
“그렇지? 그러면 말이야, 이제부터 사랑한다는 문자를 보낼 땐 말이야, 꼭 맥락을 써서 보내자. 사랑한다, 그 한마디만 보내면 너무 많은 생략이 있어서 대체 무슨 상황인지 짐작할 수 없어 불안한 거 같으니까 말이야. 가령 <주말에 하루 종일 붙어 있었는데 월요일이라고 떨어져 있으니 왠지 더 보고 싶네 사랑해> 이런 식으로 말이야.”
“......”     


우리의 연애시절을 생각해보면 나는 맥락 없이 ‘보고 싶다’ ‘사랑한다’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보내는 사람이었다. 왜 보고 싶어졌는지 상황 따위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혼자 길을 걷다가 하늘을 올려다봤는데 달빛이 너무 예뻐서 보고 싶었고, 소설책을 다 읽고 그 감동에 취해서 사랑한다고 한 마디 툭 던져버리기도 했다. 그러면 남편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보고 싶다고 대답해줬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말을 들으면 무슨 일인가, 걱정부터 될 거 같으니. 이게 무슨 일이람. 평생의 로맨티시스트를 꿈꾸며 살았거늘, 우리 사이에 ‘사랑한다’는 말의 질감이 바뀐 걸 여태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니.      


남편과 대화가 이어진다.

“일단 이 사태는 말이야, 사랑한다는 말을 별로 안 하고 사니까 그런 거 아닐까?”
“그렇긴 한데, 그렇다고 사랑한다는 말을 매일매일 입에 달고 사는 것도 아닌 것 같아. 내 마음의 진지한 무게가 담기지 않잖아.”
“그런가.”
“그런데 다르게 생각해보면 항상 사랑하는 마음을 품고 사는 게 맞거든. 그러면 매일 표현해야 하는 건가. 사무실 내 옆자리 직원은 아이하고 항상 전화통화할 때마다 매일 똑같은 말을 하거든. 아이가 ‘엄마 사랑해요’ 이러면 엄마도 ‘응, 엄마도 사랑해’라고 말하고 전화를 끊더라고. 그 조그만 아이는 항상 엄마를 사랑하는 마음이라 자연스럽게 표현하는 거잖아. 항상 사랑하는 마음으로 산다면 항상 표현하는 것도 맞는 거 같아.”
“그러면 그 말이 너무 식상해지는 거 같지 않아? 오늘 밥 먹었어? 오늘 뭐 했어? 이런 말처럼 평범한 말이 돼버리잖아.”
“맞아. 생각해보니 강아지도 ‘사랑해’라는 말을 결정적인 순간에 아껴서 하더라고.”
“강아지가?”
“응. 천재견이라고 소문난 뭉이라는 얘야. ‘엄마, 까까, 주세요, 산책’ 같은 단어를 녹음해놓은 벨을 눌러서 엄마랑 의사소통을 하거든. 그런데 ‘사랑해’라는 말을 절대 남발하지 않아. 엄마가 아플 때나, 위로가 필요한 순간에, 딱 그 순간을 캐치해서 한다고. 아무 때나 누르면 덜 감동적일 거야. 딱 그 순간에 필요한 말을 하니까 더 감동적인 거지.”     


한참 생각에 잠겼다. 사랑한다는 말이 가진 질감은 확실히 달라졌다. 연애했을 때는 이성에게 전하는 그리움의 언어이자 외로운 내 마음을 들여다봐달라는 말이었다면, 지금은 가족으로서 연대감, 책임감, 안위를 걱정하는 마음... 이런 감정을 포함하고 있으니 분명 의미가 변했다. 그때는 100℃의 활활 타오르는 뜨거운 언어였다면 지금은 80℃ 정도의 미지근한 열기를 가진 단어가 돼버렸다. 그때는 서로를 향한 호기심, 열정이 가득했다면 지금은 이해하고 배려하는 마음이 커졌다. 그러니 평소 안 하는 말을 던진 상대방의 마음씀을 걱정하게 된 것이리라. 이 미지근한 사랑을 표현할 단어는 따로 없는 걸까. 의미가 변했는데 같은 단어를 계속 써야 하는 괴리감 때문이라면 표현을 바꾸면 되지 않을까.      


그런데 남편이 의외의 해답을 줬다.

“이만기 말이야, 완전 경상도 남자잖아. 경상도 남자가 ‘사랑한다’, ‘보고 싶다’ 이런 말 하는 건 정말 힘든 일이야. 자라난 환경의 지역 특색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거든.”
“그럼 경상도 남자는 사랑하는 사람한테 뭐라고 말해줘?”

경상도 출신의 남편이 조금 고민하더니 이렇게 말한다.

“음.... 굳이 표현을 한다면, 네가 안 싫다, 이 정도?”
“푸하하하. 뭐라고? 사랑하는 사람한테 기껏 한다는 말이 그거라고? 네가 안 싫다??”
“그 말이 뭐 어때서. 정말 좋아하지만 쑥스러운 데 어떻게 대놓고 사랑한다고 말해? 경상도 사람이면 다 공감할걸. 아내를 위해서 맛있는 음식을 사 갖고 들어오면서 괜히 낯간지러워서 ‘먹어라, 오다가 주웠다’ 이런다고. ‘당신이 좋아할 거 같아서 사 왔어’ 이런 간질간질한 말은 할 수 없다고!!”
“근데 당신은 경상도 남자지만 안 그렇잖아.”
“그야 서울 살면서 서울물 든거지.”      


‘네가 안 싫다’도 사랑한다는 말의 또 다른 표현이 될 수 있다니. 실제로 남자 친구가 저렇게 말하면 나는 속으로 엄청 실망할 거 같은데. 저 말이 온 마음을 담아 표현한 전부라면... 그렇다면 표현과 형식이 중요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 어떤 말을 주고받든 서로 마음을 느낄 수 있는 게 중요한 거지.


나는 ‘남편을 사랑한다’는 내 말의 의미가 예전과 달라졌음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는 한때 나의 뜨거운 연인이었지만 이제 남편이란 이름으로 내 옆에 서있다. 그때는 어린 마음에 그와 조금이라도 더 닿고 싶은 애타는 마음이었다면, 이제 그의 옆에서 그를 지지해주는 좀 더 어른스러운 사랑으로 발전했다. 젊은 날의 애타는 열정은 사라졌지만 이 미지근한 사랑이 어째 그때보다 더 끈끈하고 끈덕진 거 같으니, 너무 실망하지 않기로 했다. 사실 방금 끓여서 부은 차는 뜨거워서 마시질 못한다. 80도 정도의 온도가 먹기 딱 좋다. 지금 이 온도가 계속 유지되는 게 부부의 사랑 아닐까. 서로 가장 편안한 이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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