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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씩씩 Aug 05. 2017

영화 '꿈의 제인' 리뷰

이런 개 같이 불행한 인생, 혼자 살아 뭐하니


안녕, 돌아왔구나?


영롱한 꿈의 제인 포스터


 꿈의 제인은 여전히 예고편만 보면, 마음이 울렁이는 영화다. "안녕, 돌아왔구나?"라고 말하는 제인의 첫 등장 씬은 언제나 미묘하게 숨이 턱, 하고 막히는 기분이다. 제인의 목소리도, 표정도, 이어지는 음악도 너무나 좋아서. 그런 예고편에 영롱한 포스터까지 접하고 나니, 꿈의 제인에 빠져들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예고편만 보고서 이 영화는 반드시 봐야겠다, 생각하는 경우가 많지는 않은데 꿈의 제인은 예외적이었다. 예고편에서 나왔던 제인의 대사들이 너무나 내 스타일이었기 때문이었고, 예고편에서 접한 제인의 캐릭터가 너무나 매력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영화가 개봉하기 전부터 꿈의 제인에 매료되었기에 예고편을 몇 번이나 돌려 보고 갔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영화관에 가서 만난 꿈의 제인은 내 예상과 너무나 달랐다. 이렇게 영화 초반부부터 당황했던 영화는 드물었다. 기대했던 장면들이 영화 초반부에 우수수 나와 버리고, 영화의 제목이자 영화의 주인공이라 믿었던 제인마저 죽음을 맞이한다. 도대체 나머지 반은 뭘까? 하는 심정으로 혼란 속에서 가출 청소년으로 살아가는 소현의 현실인 2부를 맞이했던 것 같다.  


 솔직히 외면하고 싶었다. 너무 바닥이라서, 이렇게까지 우울한 영화는 처음이라서. 감성이나 톤이 우울한 영화가 아니었다. 오히려 단조롭고 일상적인 톤으로 영화를 그려 나가지만, 그 이야기는 너무나 잔인했고, 참혹했다. 무자비한 연쇄 살인마가 등장하는 것도 아니고, 피가 미친 듯이 튀기는 영화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보기 힘들다 느꼈던 이유는 어디엔가 존재할 현실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영화를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처럼, 분명 이런 현실이 존재함을 알면서도 그 현실에 시선을 돌리고 싶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지수와 소현, 그나마 온기를 느낄 수 있었던 두 사람의 장면들


 어떤 캐릭터 하나 현실적이지 않은 게 없었다. 지나친 의리, 무조건적인 사랑. 그런 건 없었다. 그렇다 해서 인간에 대한 애정이 아예 남아 있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그 와중에도 지수는 소현을 챙기고 예뻐했고, 대포 역시 지수와의 관계를 완전히 놓지 않았다. 그러나 같이 살면 안 되냐는 소현의 제안에 지수는 돌려 돌려 거절의 의사를 전했고, 이미 거절에 익숙해진 소현은 자신이 부담스러워졌다는 것을 다 안다고, 그런 반응이 너무나 당연하고 자신은 이미 익숙하다는 식으로 말한다. 현실 앞에 무조건적인 것 따위는 없었다. 무조건적인 선도, 악도 없었고, 영원히 지속될 약속도, 관계도 없었다. 그때그때 변화하는 감정과 이익 관계만 남아 있을 뿐. 


 인간의 악한 모습이라기보다는, 인간의 추락한 모습을 가감 없이 보여준 영화였다. 악하다고 말할 수 없는 이유는, 그 악행이 본성에서 비롯된 게 아님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런 상황과 환경에 있지 않았다면 절대 그런 일들을 저지르지 않았을 테니까. 그들이 접해온 것들이 그랬기에, 그런 방식을 생각하고 시도했겠구나. 시도하고 후회를 하고, 자신이 괴물이 되었다고 느꼈겠지만, 그제야 포기하기엔 자신의 지위 같은 것들이 하찮아 보일까 두려워서, 되돌리지도 못했겠구나, 싶었다. 이해하는 것은 아니지만, 명백히 해서는 안 될 행동이라는 것을 알고, 인간이면서 어떻게 저런 행동을 하지 싶기도 했지만, 그렇다 해서 속 편히 '나쁜 놈'이라고 비난할 자신은 없었다. 


 그 세계가 옳지 않음을 알아도, 그런 방식이 아니고서는 어떻게 세계를 살아 나가야 할지 몰랐을 테니까. 그렇지 않은 세계에 어떻게 진입할 수 있는지 도저히 알 수 없었을 테니까. 행복할 수 있는 방법도, 서로 의지하고 사랑할 수 있는 방법도,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방법도, 그 어떤 것도 제대로 배운 적이 없을 테니까. 옳지 않다는 것을 알아도, 겪고 살아온 대로 생각하고 대처하는 게 몸에 배어 있었을 테니까. 그렇게 살고 싶어서, 그렇게 산 건 결코 아닐 테니까. 


 그래서 악하다고 말하기에는 마음이 찔렸다. 그래도 그 추락이 잔혹해서, 눈을 감고 싶었고, 제발 그 바닥까지는 가지 말아 달라고, 진부해도 좋으니까 제발 급작스러운 상황 변화로 구원해 줬으면 좋겠다고, 제발 이 불행이 나아가는 것을 멈춰 달라고, 영화를 보는 내내 생각했다. 그러나 사실 불행은 멈추지 않았다. 다만 영화는 불행의 잔혹함을 있는 그대로 내 보이는 장면은 넣지 않는다. 불행을 예상할 수 있는 장면만 넣을 뿐. 불행을 예상하고 눈을 질끈 감아야 하나 고민하는 순간, 영화는 그 직접적인 장면은 생략한다. 그 의외성이 좋았다. 마음을 졸일 만큼 졸이다가, 의외의 장면이 나오는. 가장 눈을 감고 싶었던 순간, 마이쮸를 건네는 장면이 이어졌던 것은 아마 잊을 수 없는 반전의 장면으로 남지 않을까 싶다.  


소현의 한없이 무기력한 표정, 한없이 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2017년 최고의 위로, 사랑하는 제인

 

 되씹을수록 좋은 게 더 많았던 영화다. 좋아하면서도 질투를 하던 소현이라는 인물도, 소현의 그 한없이 무기력한 표정도. 세상에 대해 더 이상 아무런 기대도 품고 있지 않은 소현의 표정을 보는 게, 가장 괴로웠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그 괴로움을 숨기지 않아 좋았고, 그 괴로움을 괴로움으로 끝내지 않아 좋았다. 이 영화에는, 제인이 있었으니까. 어떻게 보면 너무나 절실한 구원주로 그려지는 제인. 그러나 사실 제인 역시 완벽함, 그러니까 세상이 요구하는 완벽함과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나 먼 인물이라는 게 좋았다. 불행을 모르는 사람이 불행을 보듬는 건 보고 싶지 않았으니까.  


 꿈의 제인은 불행을 동정하게 하지도 않았고, 불행을 체념하게 하지도 않았고, 그렇다 해서 속없는 희망의 말을 건네지도 않았다. 불행을 있는 그대로 보되, 딱 적절한 양의 위로를 건네는 기분이랄까. 삶에 대한 무한한 희망을 품게 하는 게 아니라, 제인이 말했듯 이 세상은 불행의 연속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지만 중간에 모래가 흩뿌리듯 행복이 있을까 말까 한 것도 보여주는, 그 흩뿌리는 모래알 같은 행복의 순간들 역시 포착할 줄 아는 영화다. 온통 불행 투성이인데, 불행을 부정하지 않고 가감 없이 드러내면서도, 삶을 지속하고 싶게끔 만드는, 묘한 영화. 



제인이 등장하는 장면은 모두 소중했지만, 특히나 아끼는 장면 중 하나.
 이건 내 생각인데, 나는 인생이 엄청 시시하다고 생각하거든. 태어날 때부터 불행이 시작돼서 그 불행이 안 끊기고 쭈욱 이어지는 기분? 그런데 행복은 아주 가끔, 요만큼 드문드문 있을까 말까? 이런 개같이 불행한 인생, 혼자 살아 뭐하니. 아무튼 그래서 다 같이 사는 거야.

 그토록 나를 매료시켰던, 예고편에서 보자마자 한눈에 반했던 장면. 불행을 아는 사람이 말하는 불행. 불행이 쭉 이어지는 게 인생이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살아갈 수 있는 이유이자 방법. 불행을 말하면서도 웃음기를 잃지 않는 제인을 사랑했고, 불행을 자각하고 있으면서도 다른 사람을 웃게 만드는 제인을 사랑했다. 제인이 선사하는 시시한 행복의 맛에 중독되는 기분이었다. 제인 같은 존재가 곁에 있다면, 개 같이 불행한 인생이라 해도 살아볼 만하지 않나, 싶을 정도로. 제인이 그토록 많은 사람들에게 강렬하고, 위로가 되는 인물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서 제인의 존재를 갈구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혼자이고 싶지 않았던 순간들, 혼자서 버텨내고 싶지 않았던 불행의 순간들에 우리는 늘 혼자였으니까. 괜찮은 척 하고 살아 왔지만, 사실 '이런 개 같이 불행한 인생, 혼자 살아 뭐하니. 같이 살자'라고 말해 줄 사람이 필요했으니까.



대사와 일치하는 장면은 아니지만, 함께 모여 있는 스틸컷이 이것뿐이라.
이거 봐봐, 케익이 몇 조각 남았니? 세 조각 남았지? 너네가 앞으로 살면서 말이야, 이런 일이 있으면 그때 넷 중 하나라도 케익을 포기하게 만들어서는 안 되는 거야. 엄마가 무슨 말 하는 줄 알아? 차라리 셋 다 안 먹고 말아야지, 그치? 인간은 시시해지면 끝장이야.

 사실 소현이 제인과 함께했던 시간에도, 딱히 특별한 것들을 하지 않았다. 저런 것을 하니까 행복하지, 뭐 이런 느낌이 드는 유난한 행동은 없었다는 거다. 그러나 영화를 다 본 후 되돌아보면, 제인과 소현이 함께했던 시간들은 찬란하게 느껴졌다. 유난하지 않았던 순간들이 찬란했던 건, 영화 내내, 그리고 영화가 끝나고 난 뒤 이어지는 현실에서도, 케이크가 3조각 남고 사람이 4명 남았을 때 못 먹는 사람이 생기는 것을 피하기 위해 차라리 다 안 먹었던 적이 없어서가 아닐까. 조금이라도 자신이 더 많이 먹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는 사람들에 너무나 익숙해져서 그랬던 게 아닐까. 그랬기에, '차라리 다 안 먹고 말지.'라고 말할 줄 아는 사람의 존재 자체가 찬란했는지 모르겠다. 그 자체가 특별하고, 유난스러운 일이었나 보다. 



개인적으로 소현의 대사 중 가장 마음이 아팠던.
방법을 모르겠어. 어떻게 해야 사람들이랑 같이 있을 수 있는지 방법을 모르겠어요.

 꿈의 제인 GV에서 인상 깊었던 부분 중 하나가, 바로 이 대사와 관련된 부분이었다. 소현은 사람들과 함께 있을 수 있는 방법을 모르겠다고 했는데, 감독님과 배우님들은 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냐는 질문이 있었고, 그에 대한 감독님의 답을 기억한다. 감독님은 자신의 주변 이웃인 배우 구교환을 보면 알 수 있다고 했고, 그 사람은 가장 단순한 진리를 실천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가장 가깝고,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을 언제나 최우선으로 하는 사람이라고. 살다 보면 늘 일에 밀리고, 새로 만나는 사람들에 밀려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이 뒷전이 되어 버릴 때도 많은데, 구교환은 언제나 사랑하는 사람들을 최우선에 두는 사람이라고. 적어도 그렇게 살면,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만큼은 함께 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했다.


 들으면서 그 말에 너무나 공감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이토록 치열하게 살아 왔는데, 막상 그렇게 살아오는 과정 속에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없었구나. 사랑하는 사람들이 최우선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나의 삶에서 가장 우선시되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렇게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 것인지, 무엇을 사랑하고 있는지 생각해 볼 틈도 없이 앞만 보고 달려 왔더니, 나에게 남아 있는 건 아무 것도 없구나. 결국에 나는 혼자 남았구나. 혼자 남고 나서야 이게 아니었나 보다, 느낀 사람들의 이야기를 너무나 많이 접했다. 그렇지만 여전히 세상은 빈틈 없이 살아가기를 요구하고, 끊임없이 새로운 자극들이 우리를 유혹한다. 그 세상 속에서 가장 가깝고,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을 항상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게 보이지만 너무나 쉽지 않은 일이다. 당연한 말로 들릴 수도 있지만, 당연하기에 우리가 놓치고 지나갔던 진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당연한 진리를 짚어 주신 감독님께도, 그 진리를 실천하고 계신 구교환 배우님께도 고마움을 느꼈던 그 날의 GV.


제인의 몸짓, 표정, 대사 하나하나 사랑해.
그렇게 저는 여전히 혼자인 채로 살고 있습니다. 제 진심이 언젠가는 전달될 거라고 믿으면서요. 물론 이 외로운 삶은 쉽게 바뀌지 않겠죠? 불행도 함께 영원히 지속되겠죠. 뭐, 그래도 괜찮아요. 오늘처럼 이렇게 여러분들이랑 즐거운 날도 있으니까 말이에요.

어쩌다 이렇게 한번 행복하면 됐죠. 그럼 된 거에요.

자, 우리 죽지 말고 불행하게 오래오래 살아요. 그리고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또 만나요. 불행한 얼굴로, 여기 뉴월드에서.

영화가 끝나고 나서 집에 돌아가던 길, 같이 본 사람이 물어 왔다.

"어떤 장면이 가장 좋았어요?"

여러 장면을 곱씹다가, 아무래도 마지막 장면이겠죠, 라고 대답했던 기억이 난다. 마지막 장면에서 제인이 한 모든 말들을 빠짐없이 사랑했다. 그 말들을 건네던 제인의 눈빛도, 그리고 그런 제인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던 소현의 미소도 모두 다 사랑했다. 한 인물이 긴 대사를 하는 장면보다는, 두 인물이 대화를 주고 받는 장면을 좋아하는 게 일반적인 나의 패턴이었는데, 꿈의 제인에서만큼은 예외였다. 마지막 장면이 압도적으로 좋았고, 그래서 눈을 질끈 감고 싶어지는 순간들도 많았던 이 불행한 영화를, 사랑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리고 이 불행한 영화를, 2017년 최고의 위로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죽지 말고 불행하게 오래오래 살아요'라는 말이 그렇게 좋았다. 흔히들 우리가 하고 듣는 덕담은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세요', '행복하게 오래오래 사세요' 이런 말들이 아닌가. 제인의 덕담은 이런 일반적인 덕담과는 꽤 달랐다. 일단 '너'에게만 건네는 덕담이 아니라, 자신까지 포함한 '우리'에게 건네는 덕담이었다. '사세요'를 대신한 '살아요'라는 말은 '이 불행한 세상에서도 나는 어떻게든 살아가겠다, 그러니까 당신도 삶을 저버리지 말아달라'라는 일종의 약속처럼 들렸고, 그 약속은 진심을 담은 절실한 약속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 말은 약속이자 위로가 되었다. 무턱대고 힘내라는 말, 뭔지도 모르면서 일단은 다 잘 될 거라는 말, 노력하면 언젠가는 빛을 볼 거라는 말, 위로긴 위로인 것 같은데 위로로 다가오지 않는 말들이 판치는 세상에서, 위로 그 자체로 다가왔던 제인이라는 존재. 어찌 이 영화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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