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앞둔 80대의 내가, 시간여행자가 되어 현재의 나를 만난다면
*죽음을 앞둔 80대의 내가, 시간여행자가 되어 현재의 나를 만났다. 두 사람이 만났을 때 세 곡의 노래가 흘러나오고, 노래가 끝날 때까지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상황.
(2018 SBS 예능PD 작문 문제에서 차용했습니다)
그리웠던 시절의 눈이었다. 서로 빤히 바라보고 앉아 있으면, 그 누구든 유혹할 수 있으리라 믿었던 시절의 눈. 눈과 눈이 맞닿을 때만큼, 짜릿한 순간은 없다고 믿었던 시절의 눈. 그렇게 수없이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새로운 풍경들을 만나고, 새로운 이야기들을 담으며, 쉼없이 반짝였던 시절의 눈. 이렇게 온 마음을 담아 상대를 바라보면, 그 눈빛이 과연 어떨까. 그런 순간의 내 눈빛이 어떤지, 한번은 마주해 보고 싶다. 그렇지만 평생 내가 내 눈을 마주하게 될 일은 없겠지, 그런 실없는 상상도 하던 시절이었다. 그래도 사람 일은 모르는 것이로구나, 이렇게 그 시절의 눈과 맞닿을 기회도 주어지고. 속으로 수없는 이야기를 쏟아내며 그 아이를 바라보다 보니, 어느새 노래가 끝나 있었다. 무슨 가사인지 제대로 듣지도 못했는데, 우리를 만나게 해 준 존재가 뜬금없이 왜 이런 음악을 틀어준 것인지, 실마리라도 얻었어야 할 것인데. 나이가 들어서인지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는 점점 약해지고, 눈앞에 나타난 그리운 시절의 나는 점점 찬란하게만 보였다. 그러니 어쩔 수 있나, 마냥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먼저 말을 걸려고 했는데, 그 아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눈싸움이 끝나기라도 한 것처럼, 노래가 끝나자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렸다.
“한 30년 뒤의 나를 만난 거였으면, 그래도 얼굴이나 옷차림을 보고 살아온 삶의 궤적을 가늠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죽음을 앞두고 만나니까, 죽음 앞에서는 다 똑 같은 것 같네요. 어떤 사람이었든, 어떤 삶을 살았든 누구나 다 비슷하네요.”
“왜,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나이가 들어서 실망했어? 그냥 평범한 할머니가 되어 버려서?”
“아니요, 그렇게 먼 미래는 아득해서 상상해 본 적도 없는 걸요. 요즘 살기도 바쁜데, 아까 노래에서도 그러잖아요. 오늘도 답을 모르는 질문에 끝없이 답을 한다고. 제가 지금 딱 그러면서 살고 있거든요. 지금 하루하루 살면서 답을 고민하기도 바쁜데, 언제 먼 미래까지 그려봐요.”
시니컬한 말투처럼 들려도, 미소를 놓지 않아 장난스럽게 들렸다. 너는 충분히 잘 살고 있고, 그런 고민이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라고, 진부한 듯 보이는 위로를 건네려는데, 그 아이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오늘 이렇게 만나 보니까, 지금 이렇게 고민할 게 뭐 있나 싶어요. 이렇게 죽음 앞에서 결국 우리는 다 비슷한데. 더 괜찮은 어른이 되겠다고 그렇게 아등바등 살 필요가 있나, 그냥 지금의 내가 괜찮은가, 수시로 살피면서 살면 되겠다 싶어요.”
잠시 말을 쉬더니, 웃으면서 이런 말을 덧붙였다.
“저 원래 이렇게 초면에 솔직하게 말하는 사람은 아닌데. 특히 어르신 분들께는 더더욱. 아시잖아요, 제가 어떤 사람인지. 그냥 저라고 생각하니까, 어떤 말을 하든 다 이해하고, 말로는 표현되지 않은 마음까지 알아주실 것 같아서 그냥 솔직하게 이야기했어요. 늘 나보다 어린 사람들을 궁금해하고, 잘 소통하고, 격식 없는 어른이 되고 싶어 했으니까. 지금 이렇게 대화 나누는 거, 괜찮죠?”
그럼 알지, 잘 알지. 네가 어떤 사람인지. 저렇게 태연하게 말하면서도 그 순간이 지나고 나면, 혹시 기분 상하게 한 말은 없을까 곱씹는 아이였다. 그리고 유쾌한 척하느라 건넸던 아무 말 대신, 이런 말을 하는 게 낫지 않았을까 생각할 아이였다. 물론 그런 생각을 오래 마음에 담아두는 아이는 아니었다. 매사의 그 적당함이, 평온함이 좋았다. 그 시절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우리는 매사에 적당한 인간이었다. 지금의 나와 비슷한 측면이 남아 있는 그 아이를 보니, 웃음이 나서 실없이 웃었다.
“뭐, 나한테 궁금한 건 없어? 미래에서 온 사람한테는 궁금한 게 많을 텐데.”
뭐라도 가르침을 줘야 하는 건 아닌지, 뭐라도 도움이 되어야 하는 건 아닌지 싶어서 대화 주제를 바꿔 보았다. 그러지 않으면, 반짝이는 그 아이를 마냥 바라보다가 주어진 시간이 다 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글쎄요, 아까 랩에서 그러던데. 행복이란 무엇일까. 이런 철학적인 질문하기에 적절한 타이밍일까요? 사실 저는 주위에 남아 있는 행복을 잘 안 놓치는 사람이라서, 그런 건 그다지 궁금하지 않고요.”
나와는 다르게, 주어진 음악을 잘 들은 모양이었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살아가는 데에 있어 중요한 질문이긴 하지만, 그 질문에 대한 답은 그 아이가 더 잘 알고 있을 터였다. 그 사실을 아는 것인지, 그 아이도 그런 질문은 쿨하게 넘겼다.
“아이유는 결혼하나요? 팔레트 들으니까 문득 궁금하더라고요, 아이유 같은 사람도 결혼을 할지. 하면 어떤 사람이랑 할지.”
아마 자신도 결혼을 하는지, 한다면 어떤 사람과 하는지 묻고 싶었던 것 같았다. 수없는 미래와 관련된 호기심 중에, 가장 궁금한 게 결혼이라 하면 우스워 보일까 봐 아이유 핑계를 대고 있는 것이었다. 이 나이를 먹고, 그 얕은 수도 모를 리가 있나. 사실은, 말하지 않아도 그 수를 읽어주기를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너도 결혼해. 좋은 사람 만나서.”
“결혼을 하긴 하는구나. 간섭하고, 간섭 받는 것을 딱 질색했던 사람도, 결국 누군가에게 적극적으로 관여하고 얽히면서 살겠다고 결심하게 되나 봐요. 진짜 좋은 사람이었나 보다, 그쵸?”
“네가 눈이 좀 높아야지. 지금도 아무나 만나는 타입은 아니잖아?”
“제가 80대의 할머니와 이런 농담을 하고 있을 줄이야. 젊게 사셨나 봐요. 그건 너무 좋다.”
헤어져야 할 시간이 가까워지는데, 우리는 그렇게 가벼운 농담만 주고받았다. 적어도 서로가 서로를 미워하고 있지 않으니, 다행이었다. 지금껏 살아온 세월이 나쁘지는 않았나 보다, 그래도 괜찮게 살았나 보다 싶었다. 그 누구에게 인정받았던 것보다도, 그 아이가 웃으며 너무 좋다고 나직하게 말했던 순간보다 기쁘지는 않았다.
“할머니라고 불러야 하나, 선생님이라 불러야 하나. 잘 모르겠는데, 저 헤어지기 전에 꼭 들려드리고 싶은 노래가 있어요. 아직 기억하실지 모르겠는데, 제가 진짜 좋아하는 노래거든요.”
모두가 콩나물 같은 에어팟을 끼는 시대에서도, 꿋꿋이 유선 이어폰을 쓰고 있었다. 얼마 만에 보는 유선 이어폰인가. 주섬주섬 꺼내어 이어폰의 한쪽을 내게 건넸다.
“언젠가는 저도 무선으로 갈아타겠죠? 분명 진작 왜 안 샀나 하고 후회하고 있을 거예요. 그래도 지금 같은 순간에, 이어폰 핑계로 나란히 붙어 앉아 있고. 아직은 저는 이런 낭만이 좋아요.”
도대체 무슨 노래를 틀으려는 것일까, 숨을 죽이고 기다리는 찰나에 너무나 익숙한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안정적이고 편안한, 오래된 노래의 마력이었다. 참 너답다는 생각에, 웃음이 나면서도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저는 이 가사가 좋거든요. 기다려줘, 내가 그대를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저는 여전히 이해 못하는 게 너무나 많고, 어려운 게 너무나 많아요. 그럴 때마다 에라, 모르겠다, 포기하고 싶어지는데, 이 노래는 그렇지 않잖아요. 이해 못한다는 것, 다르다는 것 자체를 인정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그 사실을 인정하고 노력하겠다고 밝히잖아요. 그리고, 기다려 달라고 부탁하잖아요. 저는 이만한 로맨스가 없다고 생각해요.”
“그걸 지금 나에게 들려주는 이유가 있니?”
“진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 꼭 이 노래를 같이 들어야겠다고 생각했거든요. 기다려 달라고, 낭만적으로 말을 건네려 했거든요. 언젠가 결혼을 했을 정도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다면 분명 이 노래를 함께 들었을 것 같아서. 그리고 그 노래를 들은 순간을 평생 잊지 못하고 살아갈 것 같아서. 그래서, 떠나시기 전에 그 아름다운 순간을 한 번쯤 다시 떠올리시고 가시면 좋을 것 같아서.”
기타 선율에 겹쳐지는 그 아이의 목소리. 그리고 어렴풋 다시 겹쳐지는 그 이의 목소리. 처음 누군가에게 사랑한다고, 소리 내어 말했던 밤이었다. 역시나 현명한 아이였다. 오지 않은 미래임에도 불구하고 그 순간을 사랑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 떠나기 전에 말해 주고 싶었다, 상상하는 것보다 그 순간은 훨씬 더 로맨틱하다고, 더 낭만적이었다고. 그러니까, 기대해도 좋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