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지금, 누군가에게 권할 만한 그런 상태가 아니라서 그래...”
대학생이 되고 처음 사귀었던 그 사람은 헤어지자는 내 말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 사람이 나를 떠날 거라는 불안감에 착한 눈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내 쪽에서 먼저 칼같이 관계를 정리해 버렸다.
이후로 마구 인간관계를 끊어대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나의 진짜 생각이나 진짜 감정을 들키지 않을 수 있는 감정 좀비 관계를 마구 맺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다 거짓말이 들키거나 속마음을 들킬 때면 다리를 폭파하고 도망가듯이, 관계를 끊고 도망쳤다.
이런 나의 도망력은 엄마에게서 온 듯하다.
‘징징거리는 애는 정말 싫어’
‘칭칭 감기는 애는 싫어해’
엄마는 늘 이렇게 말했다. 그래도 나는 차갑게 밀어내는 엄마 치마 끝단에 새끼손가락을 걸쳐 놓고 있었다고 한다. 엄마한테 치대고 안기고 싶은데 그러지를 못하니 치맛단에 손톱이라고 걸치고 있었나 보다. 삶에 고단해 어린 딸을 토닥여줄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이해했다.
어느 날 내가 세던 엄마의 고단함 외에 새로운 고단함을 더하게 된 일이 생겼다. 삐이익 나무로 된 방문이 제멋대로 열려버리고 엄마는 급히 눈가를 가렸지만 보라색에 더해진 불그스름한 멍을 나는 보았다. 방문은 바람과 소리를 내며 닫혔고 저녁 밥상에서 손을 높이 치켜들고 있던 아까의 아버지를 못 본 척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 후로 나는 엄마가 사라질까 봐 두려웠다. 엄마는 가루처럼 스르륵 부서질 것 같았다. 내가 울거나 떼를 쓰거나 불만을 말하거나 생존 이외의 요구를 하면 엄마가 가루가 돼서 사라질까 봐 뭐든지 꾹꾹 참았다. 엄마의 고통이나 감정을 살피느라 눈치 빠르고 착한 딸이 되어 칭찬을 받고는 뒤돌아 앉아 그림 그리는 세계로 도망쳤다. 이후 어린 시절은 아름다운 부분만 선택적으로 나에게 기억시켰다. 사춘기 시절에는 항상 체하고 윗배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지팡이로 명치를 짓눌리는 악몽에 매일 밤 깨는 것을 반복했다.
내 청소년기를 잠식했던 불안증에도 불구하고, 드디어 나의 엄마는 나를 버리고 도망갔다. 도망을 받아들이고 덤덤하게 짐을 싸서 택시에 엄마를 태워 보내며 손도 흔들었다. 울지도 않았고 속이 시원하고 후련했다. 엄마의 결정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더 이상 착한 딸이 아니고, 성인이 된 자식이 매달리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 생각했다. 허물 뿐인 정상 가족을 위해 더는 희생하지 않겠다는 엄마의 결단을 존중했다. 자식의 행복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시간은 20년이면 충분했다. 대학입시에 미끄러져 재수를하는 바람에 엄마의 도망이 일 년이나 유예되었던 것에 대한 죄책감에 더욱 감정을 숨기려 가면을 썼다. 나에게만은 다정했던 이중적인 아버지가 다그치며 화를 낼 때 엄마의 새 주소를 말하지 않고 버틴 건, 이제부터 불행의 자리에 내가 대신 들어가 엄마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받은 가부장의 부당함과 폭력을 자식에게 투사하지 않으려고 엄마는 독하게 노력해왔다. 엄마의 멍이 만든 안전한 그늘 속에서 성장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더욱 침묵했다. 엄마 얼굴에 멍이 생기는 순간, 가족은 해체되었다. 긴 시간 동안 우리 가족은 하나로 조립될 수 없는 낱개의 쓸모없는 부품들로 아무렇게나 자신들을 방치하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엄마의 도망은 다른 방향으로 가기 위해 잠깐 멈춰 선 것이었다. 그리고 엄마는 꿋꿋하게 바른 방향으로 걸어 나갔다. 엄마의 꿋꿋한 행보를 응원하면서도 나는 심리적으로 독립하지 못하고 여전히 남몰래 엄마의 치맛자락에 손가락을 얹고 칭얼대고 있었다. 그동안 나와 엄마를 연결하던 감정 줄을 끊어 내는데 엄청난 고통에 시달렸고, 스무 살 이후의 세계는 몽땅 뒤틀려버렸다. 이상한 남자를 사귀고 친구들에게 이용당하며 바닥을 긁는 자존감 상태로 자신을 박해했다. 모든 관계에서 나의 위치는 감정적 꼬봉 관계였고 남들의 감정 쓰레기통을 자처했다.
행복한 것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렸다. 재수 끝에 들어간 대학 캠퍼스에서 나뭇잎이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것을 보고 예쁘다 생각하는 순간, 죄책감을 느꼈다. 엄마가 좋아했던 라일락 향기가 허락 없이 내 코를 자극하면 죄책감에 계절 내내 찝찝했다. 나는 봄의 따스함을 누릴 자격이 없는데, 그동안 엄마는 얼마나 힘들었을 텐 데라며 과거 엄마의 고통에 공감하는 것으로 나 자신에게 벌을 주면 엄마에 대해 예의를 갖추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행복을 절삭하며 마음 조직이 얼어붙어서 혈액공급이 중단된 상태로 20대를 살았다. 어느 날은 입이 다물어지지 않아 병원에 가니 풍이라고 했고, 어느 날은 숨이 쉬어지지 않아 대학병원 호흡기내과에 갔더니 검사 후 정신과로 연계해 주었다. 하지만 나는 나의 특기를 살려 도망쳤다.
이후로 계속 어딘가로부터 도망치는 삶을 산 것 같다. 엄마의 도망에서 상처를 받고, 허우적대면서 정작 나는 남에게 상처 주고 도망치는 것을 반복했다. 상대의 감정을 알아차리고 적시에 도움을 주는 정서적 엄마가 되어 나에게 의존하게 만들었다가 갑자기 역할을 거부하고 도망치곤 했다. 내 주변 사람들이 모두 다 나를 떠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삶 전반을 지배했다.
‘도망’, ‘도피’, ‘회피’
세 개의 단어로 내 인생을 찰떡같이 설명할 수 있다니 참, 개떡 같다. 뒤틀린 20대를 견디고 살아서 온전히 걸어 나왔다고 안도했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단 한순간도 가지지 못한 가족 안에서의 안도감, 낱개로의 불안전함, 해체된 가정에 대한 트라우마는 내가 같은 실수를 반복하게끔 유도했다.
나는 처참하게 결혼에 실패했다. 어둠 속 어둠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 같았다. 인생의 매 단계마다 상실로 인한 우울을 경험하고 또다시 퇴행하는 것을 반복하는 시간이었다. 나의 엄마가 자식에게 트라우마를 물려주지 않으려 독하게 노력했듯이 나 또한 말간 딸아이의 손에 이끌려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오는 중이다.
요즘 들어 엄마는 밤에 벌컥 전화해 옛날엔 사는 게 너무 고되고 힘에 부쳐서 네 마음 몰라줘서 미안했다고 술 먹고 사과하는 것으로 강하게 모성을 방출한다. 당신 잘못이 아니라고 다 안다고 괜찮다고 언제 적 얘기하느냐며 웃으며 받아치고는, ‘엄마 때문에 내 인생 꼬여서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하는 원망을 끝까지 뱉지 않는다. 하지만 전화기 너머로 흔들리는 내 목소리를 다 들켰는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현장에서 노동자로 일하고 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끼며 67세에 설악산 종주하는 걸 크러시 쩌는 멋진 사람. 나의 엄마. 산에서 찍은 사진 속 표정에서 이제야 자기 자신을 찾은 것 같다는 엄마의 기쁜 목소리가 터져 나온다. 환하게 웃는 그 얼굴이 나로부터 도망가서 비로소 짓게 된 진정한 미소라는 것을 안다. 귀여운 엄마의 술주정이 우리의 어두운 기억들을 하나씩 끄집어내서 펴주고 있다. 지난 명절, 음식물 쓰레기 봉지 양손에 들고 토끼처럼 깡총깡총 뛰어가는 뒷모습을 떠올려 보니 이제 엄마도 자신을 누르던 무거운 더께를 다 걷어낸 것 같다.
적당한 거리와 시간은 우리가 온전한 인간이 되도록 조립해 주었다. 우리는 각자의 시간 각자의 방법으로 치열하게 자기 자신에게 가는 것에 성공한 듯하다. 아니, 나는 아직 멀었다. 엄마가 걸었던 길을 걷다 보면 언젠가 서로의 성장을 응원하고 지켜보는 좋은 친구가 될 수 있겠지. 그때가 되면 사람으로서 서로를 편안하게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아까 낮에 또 벌컥 전화해 김치 보냈다며 택배로 모성 발송 하시는데, 마음이 왈칵한다.
엄마의 김치 사랑받고 사랑 더 얹어서 모바일 송금 지금 쏩니다. 셋둘 하나 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