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서 본 알함브라 궁전
그라나다는
스페인 남부의 안달루시아 지방의 도시로 이슬람 건축의 정수가 남아있는 곳이다. 8세기부터 15세기까지 이슬람 문화에 지배되다가 15세기 말 경 가톨릭 군주에 정복되며 서구 문화권의 일원이 되었다. 현재는 인구 수십만의 비교적 작은 도시이지만 알함브라 궁전이라는 건축유산 덕에 꾸준히 많은 관광객을 맞고 있다. 술에 곁들여 나오는 안주인 타파스로도 유명하다.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2주간의 스페인-포르투갈 여행을 계획하며 그라나다를 포함한 이유는 단 하나, 알함브라 궁전 때문이었다. 건축과 유현준 교수가 최고의 건축물이라고 꼽은 곳이기에 그 하나만으로도 가볼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여행은 3달 앞서 계획하고 티켓이 열리는 시기에 맞춰 모든 표를 예매했다. 2개 국가와 6개 도시를 방문해야 했고 관광지는 그보다 많았기 때문에 정신없지만 모든 걸 잘 해냈다...고 생각했지만 아뿔싸, 그라나다의 유일한 방문 목적인 알함브라 궁전 예약을 까맣게 잊어버렸던 것. 출발하기 약 2주 전에 이 사실을 알고 패닉에 빠져 웃돈을 주고라도 표를 구하려 했지만 어림도 없었다. 그라나다에서 지낼 숙소, 도시를 이동하는 차편 모두 예약한 터라 그라나다 행을 무를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난 근거도 없이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인생에서 모든 일들이 잘 풀렸던 것 같다. 큰일 났다 생각했을 때에도 운이 좋게 해결책을 찾았고, 사방이 벽인 것처럼 막막한 때에도 마지막에 가서는 숨은 문이 열리는 식이었다. 그래서 웃돈주고 알아봐달라고 부탁한 곳에서 연락이 올 거라고 내심 기대하며 내 운에 한 번 더 기대보았다. 하지만 그라나다 도착 전 날 업체에서 연락이 와 표를 구하지 못했다는 소식을 전했고, 나는 정말 알함브라 궁전에 방문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마침내 받아들여야만 했다. 실망이 컸고 나에게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낙담했다. 무엇보다 최근에 시도하는 일마다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어 많이 위축되어 있던 시기에 이런 일까지 생기니 예약 하나 제대로 챙기지 못했던 내가 바보같고, 운마저 이제 등을 돌린 것 같았다.
그래도 바르셀로나에서 비행기를 타고 도착한 그라나다는 소도시 특유의 아늑함과 고즈넉함으로 우리를 한껏 반갑게 맞아주었다. 지중해에 면해 서유럽이라기보다는 건조하고 따사로운 북아프리카의 기후와 더 가까운 것 같았고, 곳곳에 오렌지나무가 있어 더 이국적인 정취를 느낄 수 있었다. 에어비앤비 숙소는 작은 도시의 중심에 있어서 그리 시끄럽지도 않으면서도 각종 관광지와 접근성이 좋았다. 특히 옥상에서 본 경치가 압도적이어서 잠시 알함브라는 잊은 채 신이 났다.
그래도 왔으니 알함브라의 경치라도 봐야지. 숙소 주인에게 추천받은 타파스 바에서 간단하게 요기를 하고 살짝 알딸딸할 정도로 술을 마신 후 산 니콜라스 전망대로 가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해질녘이 가장 예쁘다 해서 아직 파란 하늘일 때 찬찬히 올라갔는데, 경사는 꽤 있었지만 주거지대여서 도로와 치안이 나쁘지 않았고 이따금 다른 관광객들을 스쳐 지났다.
약 15분을 열심히 올라가니 알함브라 궁전의 단면이 한 눈에 들어왔다. 멀리서 봐도 저렇게 큰데, 내부에 들어가면 얼마나 웅장할까 한 번 더 아쉬웠지만, 그래도 들어갔다 왔으면 굳이 이 풍경을 보러 오지 않았겠지 라고 스스로 위로하며 더 오랫동안 보기 위해 자리를 잡았다. 파란 하늘 아래에서도 고고하게 아름답지만 석양을 받으며 붉게 물들고, 이내 저녁 시간이 다가오자 조명을 받는 모습이 장관이다. 시시각각 변하는 하늘과 그에 맞추어 변화하는 알함브라를 보는 건 잊지 못할 경험이었다. 전망대에 있는 많은 사람들과 부대껴 경치를 감상했는데, 처음 불어오던 기분 좋은 선선한 바람이 점점 차가워져 으슬해질때까지 앉아서 넋놓고 경치를 구경했다. 사진에는 차마 담기지 않게 웅장한 도시에서 궁전을 망라하는 파노라마 뷰와 갖가지 색 등은 직접 가보지 않고서는 느낄 수도 설명할 수도 없다.
최근에 많이 하게 된 생각인데, 단기적으로 나에게 잘 풀렸다고 생각한 일이 장기적으로는 독이 되어 돌아오기도 하고, 그 반대의 상황도 있다. 나 같은 경우에는 인생이 쉽게 잘 풀렸던 이력으로 내심 기세등등했던 때도 있었지만, 실패에 대한 면역이 낮아져 작은 실패에도 크게 괴로워해야 했다(현재 진행중). 어쨌든 모든건 관점에 따라 다르니까. 그라나다에서의 경험도 당시에는 내 인생의 내리막을 암시하나 지레 풀죽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냥 해프닝일 뿐이다.
내 생에 알함브라를 들어가서 볼 기회가 있을까? 뭐 또 이걸 계기로 스페인을 다시 오게 될지도 모르니 아직 판단하긴 이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