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평범함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정확하게는 평범함보다 ‘뛰어난 점이 없는(unexceptional)’ 상태에 대해 말하고 싶다.
나는 통역사다. 내가 잘하는 것과 원하는 업무 형태를 고민하다 이 길을 선택하게 되었다. 학생 때부터 언어 습득력이 뛰어나다고 자부해왔다. 어느 정도는 사실이었다. 통번역대학원에 단번에 합격했을 때, 세상이 내 것인 양 우쭐했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전국에서 모인 내로라하는 사람들 틈에 서니 나는 금세 초라해졌다. 내 실력에 화가 났고, 열등감도 많이 느꼈다. 이제는 어느 정도 내려놓고 살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착각이었나 보다. 전 직장 동료이자 대학원 후배보다 실력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익숙한 분노와 초조함이 다시 몰려왔다.
나는 암기, 영업, 추론, 수리, 음악, 미술 등 다른 분야에서는 두각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어떻게든 찾고 찾은 재능이 언어였다. 그래서 이 분야에서는 상대적인 강점을 가지고 있으리라 믿었는데, 그렇지 않다는 현실을 마주하는 일은 고통스러웠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인가? 내 인생은 의미가 있는가?
어떤 사람은 스스로의 가치를 중심에 두고 하루하루 살아가며 의미를 찾는다. 원론적으로는 동의하지만, 때로는 그것이 자기합리화처럼 느껴져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다.
그러다 우연히 도서관에서 ‘불완전한 인간’이라는 책을 빌리게 되었다. 따뜻한 심리 에세이인 줄 알고 마음의 안정을 찾고자 골랐지만, 사실은 인류학자가 쓴 과학 도서였다. 첫 장부터 인슐린의 복잡한 매커니즘이 나와 이해하지 못하고 포기할 뻔했지만, 이왕 빌린 김에 2장까지는 읽어보자는 마음으로 넘겼다. 그러던 중, 내가 줄곧 품어오던 질문에 대한 힌트를 얻게 되었다.
진화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은 자연선택을 두 가지로 구분했다. 첫째는 익숙한 개체 중심의 자연선택, 즉 개별 개체에 유익한 유전자가 선택되는 방식이다. 둘째는 집단 선택으로, 이타적인 구성원이 포함된 집단이 그렇지 않은 집단보다 생존 확률이 높다는 개념이다. 인간은 이 두 가지 선택 양식을 모두 지닌 존재다. 사회적 동물로서 집단을 이롭게 함으로써 자신의 생존 가능성을 높이는 동시에, 집단 내에서 개인적 안위를 추구하기도 한다. 인간은 개미처럼 집단을 위해 죽지도 않고, 호랑이처럼 무리를 거부하며 살지도 않는다. 모호한 경계 속에서 공존한다.
이에 기반하여 개체의 존재 의의는
1. 개별 개체로서,
2. 초개체(집단)의 일부로서
부여될 수 있다면, 나는 지금껏 철저히 1번만을 추구해왔다.
자유주의와 개인주의가 강조되는 시대 속에서, 나 역시 개체로서 뛰어난 존재가 되기 위해 주변과 끊임없이 나를 비교하며 살아왔다. 처음부터 2번의 가치는 고려하지 않았다. 그것은 구시대의 전체주의적 잔재라며 외면했다. 그런데 만약 집단의 일부로서도 내가 의미를 가질 수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진화생물학적으로도 개체가 지닌 분명한 존재 이유라면? 그렇다면 ‘뛰어나지 않은 나’ 역시 어떤 식으로든 존재의 의미를 부여받을 수 있겠다는 희망이 생겼다.
물론 뛰어난 재능으로 사회를 아름답게 만드는 뮤지션이나 철학자들도 많다. 일부는 개인적 성공 이후 여유가 생기면 사회에 공헌하려고 한다. 대학교 동기 한 명은 “높은 사람이 되어 세상의 불합리를 바꾸겠다”고 말한 적이 있다. (멋진 말이지만, 나는 그에게 정말 중요한 건 사회 개혁이 아니라 ‘높은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닐까 의심했었다.) 나 역시 그릇이 작아 내 안위만을 골똘히 고민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만약 그 안위만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면? 내 평범한 재능, 일상 속 친절함도 세상에 공헌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나에게 충분한 의미가 되고, 살아갈 힘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나처럼 지극히 평범한 개인들이 각자의 기량을 발휘하고, 일상 속에서 행복하며, 더 큰 세상에 조용히 공헌함으로써 평안과 만족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