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에서 머무른 집들
10일 간의 프랑스 여행에서 지현이와 나는 네 곳의 집에 머물렀다. 짧은 여행이면서도 잦은 이동과 많은 움직임이 필요해 시간이 많이 필요했지만 네 명의 서로 다른 개성의 호스트와 그들의 집으로 파리에 대한 기억이 훨씬 더 좋게 남았다.
우리의 숙소 정하기에는 서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둘의 머릿속에 은연중 가지고 있던 기준이 있었던 것 같다.
1) 피곤한 여행자의 몸을 편히 누일 수 있는 안전하고 깔끔한 공간
2) 적당한 가격 (1인당 7~10만원. 당시 파리 숙소 가격이 전반적으로 높았다.)
3)우리 맘에 쏙 드는 예쁜 공간
지극히 주관적이면서 나름의 객관성도 가진 기준으로 선택된 파리의 집들 (호호호)
3박 4일 간 지냈던 Florence 의 집에서의 "아침"은 참 좋았다. 서울과 파리의 시차로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생활을 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아침 시간은 길었다. 썸머타임으로 이른 아침부터 창문으로 들어오던 강렬한 햇살과 시원한 바람 그리고 거실에 놓인 나무 테이블은 아침을 즐기기에 완벽한 환경이었다. 주로 오늘 가볼 여행지를 검색해보거나 인스타그램을 했다. 잘 도착했다는 안부 인사를 카카오톡으로 보내기도 하고.
스마트폰 생활이 끝나면 가벼운 아침을 챙겨 먹었다. 숙소 바로 옆에는 큰 마트가 하나 있었는데 거기에서 산 따뜻한 바게트에 크림치즈를 발라 먹는 건 정말 맛있었다. 그리고 사과나 복숭아 같은 과일과 두유, 요거트까지 각자의 취향에 맞게 든든히. 기분 좋은 아침의 나날이었다. 덕분에 하루의 시작이 늘 활기차고 밝았다.
이 집은 건물 5층에 위치했고 엘리베이터가 없어 달팽이처럼 생긴 나선형 계단을 따라 늘 오르락 내리락 해야했는데, 그래서 계단에서 찍은 사진이 많다. 나는 파리의 집 구조가 재밌었다. 어딜 가든 큰 대문을 열고, 중문을 한 번 더 열고, 계단을 올라, 열쇠로 집의 문을 열어야 하는 꽤 철저한 보안 시스템의 집. 그런데 열쇠를 잘 사용하지 않으니 파리 집들의 문을 여는 것은 나에게 큰 챌린지였다. 지현이가 없었더라면 집을 예약하고도 대문 앞에서 잠들었을지도 모른다.
Airbnb의 시작은 호스트가 게스트에게 잠잘 수 있는 방과 아침 식사를 함께 먹자는 의미의 Air Bed & Breakfast 라고 한다. Nathalie의 집은 우리에게는 그런 곳이었다. 니스로 떠나기 전 이틀 간만 지낼 예정이라 이번에는 조금 더 저렴한 방 하나를 빌리고 부엌과 거실을 쉐어하는 곳을 예약했다. 어쩌면 3년 전 미국 네이플스에서 지냈던 마이클 아저씨의 환대와 멋진 공간을 또 경험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도 들었다.
호스트 Nathalie는 우리에게 "제 아주 다정한 작은 개가 거기 있을지도 몰라요. 그녀는 인사를 하기 위해 조금 짖지만 그녀는 절대적으로 평화롭고 제 아들 아서가 그녀를 픽업할 수도 있습니다. (에어비엔비 번역투)" 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지현이는 강아지나 고양이 털 알레르기가 있어 좋아하지 않았는데, 아주 다정한 작은 개는 정말로 다정했고, 정말로 작았다.
이곳은 "파리의 집은 모두 예쁘구나."라는 편견을 내게 심어준 집이었다. 첫 숙소는 운이었다 생각했는데 그냥 일상이었다. 깔끔한 침대와 테이블 그리고 둥그런 거울이 인상적이었던 우리의 방부터 큰 창과 햇살이 내리는 거실과 안뜰이 내다보이는 주방도 좋았다.
여기는 지현이에게 더 많은 인상이 남았을 거라 추측해본다. 내가 동네 공원과 카페를 가고 마켓을 구경할 동안, 지현이는 아침부터 이직을 위해 새 회사 인터뷰 준비를 하고 긴장 속에 인터뷰를 보았던 곳이기에. 결과가 좋아서 기분 좋은 곳으로 남았겠지.
니스행을 결정하고 빠르게 손을 움직여 집을 서치 했는데, 알고보니 재빠른 건 우리의 두뇌와 선택이었다. 카톡에 지현이가 숙소 링크를 보냈고 썸네일로 뜬 사진을 보고 나 역시 마음을 굳힌 곳이 바로 Gael의 집이다. 나는 커다란 거실에 놓인 초록색과 노란색 가죽 소파를 보고 이 집을 골랐는데 지현이는 무엇에 빠져 여기를 선택했을까.
이 집의 곳곳에는 엄마, 아빠, 어린 아들 세 사람의 사진이 많았다. 천천히 둘러보니 이들은 다양한 나라를 여행했고 아빠의 역할을 맡은 분은 사진 작가, 엄마의 역할을 맡은 분은 디자이너 그리고 어린 아들은 그림 그리기와 공룡에 관심이 많아 보였다. 집이나 그 사람의 자리를 보면 그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 수 있는 단서들이 많다. 그리고 어떤 분위기를 가졌는지. 누군가의 공간에 들어가야만 느낄 수 있는 재미이다. 사랑스러운 가족의 집에 머물렀다.
니스의 중심가에 위치했기 때문에 공항과 생폴드방스를 오갈 때 빼고는 계속 걸어 다녔다. 모퉁이를 돌면 나오는 베이커리를 지나치며 내일 아침은 여기에서 사먹자고 이야기하고, 베란다 마다 쨍한 노란색 천막이 드리운 아파트를 보며 여름을 만끽했다. 니스는 유럽에서도 휴양지인 만큼 다들 더 여유롭고 평화로운 하루를 보내는 모습도 좋았다. 그럼 나도 조금 더 여유롭고 평화로울 수 있다. 숙소에 돌아올 때 매일 밤 복숭아 2-3개과 물 한 병을 사는 것은 이번 여행의 루틴이었다. 이 짧은 시간 속에서도 루틴은 만들 수 있다.
어느덧 마지막 숙소로 짐을 옮겼다. 여행의 끝이 다가옴을 미리 체감할 수 있을 만큼 Jules의 집은 하루의 끝인 밤의 분위기가 가득한 곳이었다. 집에 들어와 조명을 하나 씩 탁,탁,탁 켜면 조금씩 밝아지지만 은은한 어둠은 내려앉은 채 쉽사리 꿈쩍 하지 않았다. 커다란 블루투스 스피커가 있어 스마트폰과 연결하고 스포티파이에서 음악을 골랐다. 지현의 선택은 드라마 "멜로가 체질"의 ost 인 "작가미정"이었는데 잔잔히 내려 앉은 어둠과 어울렸다.
Jules의 집에는 커다란 식탁 테이블이 있고 그 옆에는 기타가 놓여져 있는데 그 모습 때문에 여기를 택했다. 우리는 그곳을 아주 유용하게 사용했다. 거기에서 10일 동안 각자 결제한 내역을 살펴보고, 프링글스를 먹고, 오렌지 주스를 마셨다. 영화감독이라는 집주인의 취향에 따라 실제로 가보니 더 다양한 영화 포스터나 CD 가 많았다. 그런데 이렇게 집을 두고 Jules는 어디에서 지내는 걸까. 파리의 여러 집을 다니며 호스트들의 삶이 궁금해졌다.
아직 8월인데 벌써 여행의 기억이 흐릿해진다. (글을 쓸 땐 8월, 공개하는 지금은 10월이다.)
아 한 가지 생각났다. 이곳의 이불에서는 우리집 섬유유연제 향이 났었다. 예전에 페루 여행에서는 추위 때문에 긴 니트를 꺼냈다가 거기에서 예상치 못하게 한국에서 사용하던 세제 향이나 니트에 코를 박고 잤었는데. 향수를 일으키는 건 정말 향수인가.
P.S 반가운 소식!
Gael의 집에 머물렀을 때, 직접 만나진 못했지만 채팅으로 느껴졌던 멋진 가족의 따스함에 보답하고 싶어 작은 키링을 선물로 두고 왔다. 주황색 침구로 꾸며진 방의 어린 주인이 좋아하기를 바라며.
짧은 여행을 마치고 일상으로 돌아온 지 두 달이 되어갈 쯤, Gael이 사진과 함께 메시지를 보냈다. "Just to let you know how he love your present!"
어린 주인의 책가방에 달린 키링의 모습이었는데 그보다 사랑스러울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