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할 수 없는 비밀
#1. 나는 아직 가족들에게 춤밍아웃을 하지 못했다.
동성애자들이 자신의 성정체성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것을 커밍아웃 이라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춤을 추는 사람들이 자신이 댄서라는 것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것을 춤밍아웃이라고 댄서들은 말을 한다.
그런데 춤은 주로 시간을 여유롭게 쓸 수 있는 퇴근 후 밤에 추기 때문에 두어시간을 추고나면 이미 밤이 깊어진다. 그래서 막차시간을 항상 잘 알고 있어야 한다. 다음날 아침에도 출근을 해야하니까- 그렇게 막차생활을 하며 집에 들어가면 우리 엄마는 항상 내가 들어갈 때까지 뜬눈으로 기다리고 계신다. '이런 좋은게 있어요 나쁜게 아니에요'라고 말할 엄두도 안나서 일단 언니에게 먼저 운을 띄워봤더니 눈이 둥그래져서 질색팔색을 한다. 아 여기까지..... 그래서 지금까지도 나는 댄서라고 춤밍아웃을 하지 못했다.
흥이 나서 두어시간 내내 쉬지도 않고 춤을 추다보면 땀이 그렇게 많이 난다. 옷이 땀으로 흠뻑 젖으면 미리 준비해 온 새로운 티셔츠로 갈아입는다. 운동량이 엄청나서 옷도 자주 갈아입고 집에 오면 빨래양이 좀 된다. 그런데 한겨울에도 여름옷을 입고 추다보니 세탁기에 던져둔다고 해도 계절에 안맞는 여름옷들과 스커트를 어찌 설명을 할 것인가. 그래서 며칠 모아서 몰래 세탁기를 돌려보기도 했었다. 하지만 엄마들은 눈치가 백단이다. 온갖 고민과 추측을 다 하셨을것이다. 아마도 실체는 잘 모르지만 이정도로 조용히 노력을 하는데에 눈을 감아주신것 같다. 아마도 이렇게 쭈욱 나는 가족들에게 춤밍아웃을 하지 못할것같다.
#2. 나는 매 소개팅 자리에서 만나는 상대에게 춤밍아웃을 하지 못했다.
취미가 뭐냐고 물으면 춤을 춘다고 한다. 그럼 어떤 종류인지 물어오고 이러이러하다 말을 해주면 언제 추러 가는지 되물어오고,
'주말에 가요' 하면 상대의 얼굴빛이 변하는데 아마도 주말에 만날 시간이 없다는 사실을 인지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다음 질문은 일주일에 몇 번 가는지이다. 대체 그 춤은 뭔지 보여달라고 하고, 성격이 급한 사람들은 마주 앉아 있을때 벌써 휴대폰을 꺼내서 검색을 한다. 그러면 정말 남자 여자가 손을 잡고 이렇게 가까이 붙어서 추느냐고 얼굴빛은 더욱 어두워진다.
언젠가의 소개팅에서 취미로 클럽 디제이를 하는 사람이 나왔다. 취미라고는 했지만 주말마다 디제잉을 하러 간다고 했고 그럼 이 사람을 만나면 주말은 반납해야겠구나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이전에 언젠가 만난 사람들이 내 얘기를 듣고 지은 그 표정과 마음이겠지 순간 이해가 됐다. 그래서 그 날, 저녁만 먹고 바로 일어나 이 허전함과 허탈함을 달래기 위해 택시를 타고 가장 가까운 빠에 가서 빠 문이 닫힐때까지 정신없이 췄던 기억이 있다.
#3. 나는 직장에서 동료들에게 춤밍아웃을 하지 못했다.
내가 하는 일 중의 하나는 입시학원 강사이며, 학원이라는 곳은 학생들이 학교를 마치고 그리고 수업이 없는 주말에 추가 수업을 듣기 위해 가는 곳이다. 그러하니 자연스럽게 저녁 그리고 주말에 수업을 할 수 밖에 없는데 빠 문이 여는 시간 또한 수업을 해야하는 시간과 많이 겹친다. 학원에서는 저녁 시간대에 수업을 더 많이 해주길 바라고 주말은 더더욱 많은 일을 해주길 바란다. 하지만 몇 해 전까지 쉬는 날 없이 일에 미쳐 살던 그 때, 어느 순간 내가 왜 이렇게 살고 있는지 돌아보게 되었던 그 순간 모든 것을 놓고 떠났던 적이 있었다. 그 뒤에 하게 된 여가 생활이 바로 춤이었다. 추다 보니 좋아서 그리고 놓고 싶지 않아서 자연스럽게 일을 줄이게 됐다.
그러나 일은 해야겠는데 내가 만족할 수 있는 주당 춤 할당량이 충족되려면 평일에도 수업을 매일 하면 안되는 상황이 온 것이다. 그래서 시간표를 늘려달라는 요청이 오면 사실대로 말을 해보았다. 처음에는 재밌게 산다는 반응이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피곤한 기색이 보이거나 정말 피치못할 사정으로 수업을 변경해야 할 때에 일정 조율을 요청하면 춤추느라 그러냐고 핀잔을 준다. 퇴근 후 새벽까지 술을 마시고 출근해서 쓰린 속을 부여잡고 서로 어제 마신 술로 인한 숙취를 얘기하는 그들의 모습은 너무나도 어색하지 않게 당연한 인식인데 어째서 나의 여가생활은 모든 일상과 일을 부정적으로 덮어버리는 수단이 되는건지 안타깝다. 그래서 작년에 이직을 하고부터 직장에서는 철저하게 나의 바운스 바운스 한 일상을 언급하지 않게 되었다.
이렇게 원치 않는 비밀이 또 하나 생겨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