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치는게 꼭 비겁한 것은 아니더라.
부연 설명 없이 진행되는 서사. 친절한 영화가 아니었음엔 분명하다. 이 영화가 보고싶었던 이유는 사법고시 폐지로 만년 고시생으로 남아버린 기태가 고향인 벌교로 돌아와 생계를 위해 재개봉 영화관 ‘국도극장’에서 일을 시작한다라는 시놉시스에 끌려서였다.
때론 거창한 이야기보다 소소한 일상의 이야기들이 더 큰 울림을 주기도 한다. 감독님은 그 울림을 무척 우아하게 담아냈다. 배우들의 사투리 연기가 무척 실감나서 좋았던 것은 덤이다.
서울에서의 생활을 일시정지 시키고 내려온 벌교. 오자마자 만난 제법 성공한 오랜 친구 '상진'의 은근한 무시에 기태는 만감이 교차한다. 그러면서 잠시 내려온 것일 뿐이라며 스스로를 위안 해본다. 잠시 거쳐갈 곳으로만 생각했던 기태는 얼마 안 가 마주한 엄마의 치매를 마주한다.
아직 학자금도 남아있는 상태였고 당장 올라갈 차비도 없던 그에게 우연히 들어온 극장 일. 외지에서 온 관광객들이나 오는 찾는 이가 많지 않은 극장에서의 일이지만 그는 왠지 모를 편안함을 느낀다. 어떻든 일정한 수입이 생겼다는 것과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들이 생겼다는 것이.
사는 곳도 가족이 있는지도 모를 오씨아저씨.(미술부장으로 입사했지만 아무도 승진시켜주는 이가 없어 스스로 실장이 되어 극장을 책임지는 중이다.) 그리고 식당에서 우연히 만난 초등학교 동창 영은과의 재회.(그녀는 카페, 중국집, 펍 등에서 닥치는대로 알바를 하며 가수의 꿈을 안은 채 서울로 오디션을 보러다닌다. 그리고 기태의 기억속엔 그녀가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아마 영은이 기태를 짝사랑했었으리라 짐작해 본다.)
이 두사람과의 만남은 아직은 정착에 대한 확신이 없던 그에게 조금씩 확신을 가져다 준다. 그리고 그들과의 소통은 앞으로 나아갈 힘과 희망, 의지를 잃어버린 채 꺾여있던 기태를 일으켜 세운다.
영화 막바지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서울에는 다시 못가것어요. 무서워서. 외롭고"
쌀쌀해진 밤 기태와 오씨아저씨가 나눈 대화이다. 기회의 땅이자 희망과 꿈의 도시이지만 자칫하다간 고립되고 낙오되기 십상인 그곳 서울. 지금 난 서울은 아니지만 타지생활이 주는 고독감과 불안감을 무수히 맞닥뜨리고 있다. 그것들이 나를 어떻게 괴롭히고 있는지 잘 알아서일까. 먹먹함이 불현듯 올라왔다.
서울이란 거대 도시에서 살아남지 못한 기태는 밀리고 밀려 지방 도시로 쫓겨났다. 어찌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세상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치열하고 냉혹하며 공격적이다. 생존과 도태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고독은 그 희망마저 박살내버린다.
그렇다고 무작정 버티는것 또한 답은 아닐지도 모른다. 포기하는 것이 정말 많은 용기를 필요로 하리란 것도 안다. 그러나 포기한다고 죽지 않는다. 어떻게든 살게 되더라. 도망치는게 꼭 비겁한 것은 아니더라. 감독님이 말하고 싶었던 것은 그게 아닐까라 생각해본다.
_잔잔하고 은은하게 여운이 남는 영화. 치열하게 살아가는 우리에게 때론 쉼도 필요함을 되새기게 해주었던 하루의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