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눈이 내렸다. 차에서 내려 사무실에 들어오는 잠깐 동안에도 끊임없이 내리던 눈은 그녀의 머리와 어깨를 덮었다. 쌓인 눈을 털어 내고 사무실로 들어온 영인은 자리에 앉아 하루를 준비하며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사실 오늘은 영인의 서른두 번째 생일이다. 퇴근 후 오랜만에 친구들과 만날 약속이 잡혀 있었다. 항상 이런 날은 하루가 더 느리게 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시계의 시침과 분침이 만나는 12시. 영인은 일에 집중하느라 굳어있던 몸을 그제야 풀어본다.
점심시간이 지나고 오후 5시 30분. 분침도 초침도 한없이 느리게 간다. 오늘이야말로 영인은 칼퇴근이라는 걸 해보리라 다짐했다. 그때 부장이 영인을 부른다. 퇴근 직전에 또 새로운 일을 던져주려는 걸까. 잔뜩 굳은 표정으로 부장 앞으로 간 영인이다.
"차 팀장, 오늘 생일이라며?"
기대하지 않았던 의외의 말에 긴장했던 온몸의 힘이 쭉 빠진다.
"지난번에 T 프로젝트 끝나고 회식하라고 위에서 금일봉이 나왔더라고. 늦게 전해줘서 미안. 회식 한 번 더 하면 되겠네."
"감사합니다 부장님."
영인은 금일봉을 받아 들고 자리로 돌아왔다. 궁금해하는 팀원들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니 다들 신나는 표정이다. 당일은 너무 급하니 오늘 말고 다시 날을 잡아보기로 했다. 그때 시계의 시침과 분침이 6시 정각에 도착한다.
"오늘은 다들 일찍 들어가. 나 먼저 갈게."
"안녕히 가세요. 팀장님"
영인은 회사에서 나오자마자 택시를 잡아타고 약속 장소로 향했다. 눈도 오는 데다 주차할 곳도 마땅치 않고, 가볍게 한 잔 할 계획이라 차는 회사에 두고 가기로 했다. 최대한 빨리 나왔는데도 이미 도로는 러시아워로 주차장을 방불케 하는 상태다. 다행히 회사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약속을 잡아 30분 만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친구들과 만나기로 한 곳은 젊을 때 함께 자주 갔던 곳이다. 번화가 골목 안쪽의 조용하고 한적한 LP Bar. 20대 때부터 7080 음악을 즐겨 듣던 영인에게는 추억이 가득한 정감 가는 곳이다.
친구들은 아직 도착 전이다. 배가 고팠던 영인은 이 가게만의 특색 있는 레드 비어에 안주로 먹을 한치 구이와 치즈 나쵸부터 먼저 주문했다. 뒤이어 친구들이 하나 둘 도착하고, 테이블 위는 어느새 술잔과 안주들로 가득 채워졌다.
영인이 잠깐 화장실에 다니러 간 사이, 친구들은 케이크를 준비한다. 사장님께 부탁해서 촛불을 켜는 순간 Happy Birthday to you 음악을 틀어달라고도 했다. 화장실에 다녀온 영인은 친구들이 준비한 케이크에 이게 뭐냐고 타박하면서도 싫지 않은 듯 즐겁게 웃었다.
센스 있는 사장님이 타이밍 절묘하게 틀어주신 생일 축하 음악에 터보(Turbo)는 못 참지 하면서 춤인지 율동인지 모르게 다 같이 몸도 흔들어댔다. 언제 만나도 좋은 친구들과 함께 하는 유쾌한 시간은 빠르게도 흘렀다.
이제 각자가 속한 곳으로 헤어질 시간. 남편에게 아이를 맡기고 나왔노라고. 이런 기회는 다시없다고 집에 못 들어간다는 육아맘 친구를 달래서 집으로 보내고, 영인은 휴대폰 가득히 쌓인 축하 메시지들을 확인하며 그녀만의 아늑한 집으로 향했다.
대학교 때부터 자취를 시작해서 혼자 산지 어느새 12년. 아무도 반겨주지 않는 집이 처음에는 적막하게 느껴졌는데, 이제는 너무나 익숙하다. 기분 좋은 정도로 마신 술에 뒤늦게 취기가 오르기 시작한다. 대충 씻고 정리한 뒤 침대에 그대로 쓰러진다.
밤이 지나고 새벽빛이 방 안으로 스며들 무렵, 미리 맞춰둔 알람 소리가 울린다. 깜짝 놀라 일어난 영인은 침대를 정리하고, 깨끗이 씻고 출근 준비를 한다. 그렇게 새로운 하루가 다시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