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팔아 마트

목소리를 샀어

by Pearl K

1


유난히 성숙하고 차분한 아이였다. 굳이 드러내지 않아도 그 고요한 섬세함이 주위를 물들이는 아이. 당번을 하는 날엔 묵묵히 자신의 몫을 다해내고는 조용히 돌아갔다. 잔잔한 호수의 표면처럼 언제나 아이의 표정은 한결같았다. 그래서 몰랐다. 알게 된 후에는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 비겁한 변명이다.


나는 알았어야 했다. 더 관심을 기울였어야 했다. 잔잔해 보이던 호수의 표면 아래, 수많은 돌덩이들이 가라앉았을 흔적을 들여다봤어야 했다. 성실한 아이였다. 자기가 맡은 시간에 늦거나 빠진 적이 없었다. 3교시 쉬는 시간에 가방을 메고 도서관에 온 유원이는 ‘선생님, 제가 오늘 몸이 안 좋아 조퇴를 해서 당번을 못할 것 같아요.’하고 내게 말했다.


많이 아픈 거냐고 묻고 얼른 집에 가서 푹 쉬라는 말을 전해주었다. 유원이는 당번을 갑자기 빠져서 죄송하다며 내게 사과했다. 그게 죄송할 일은 아니어서 아픈데 당연히 쉬어야 하는 게 맞다고 했다. 도서부 당번하는 건 걱정하지 말라고, 건강이 먼저라고 말해주었다. 감사하다고 인사를 전하고 돌아서는 유원이의 뒷모습이 아련했다. 건강이 나아지고 나면 금세 볼 수 있을 줄 알았다.


내가 유원이 얼굴을 보고 이야기를 나눈 것은 그게 마지막이었다. 아이는 더 이상 학교에 오지 않았고 난 많이 아픈가 싶어 한참 걱정을 했다. 대체 무슨 일이지? 시간이 얼마쯤 지난 후, 믿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또래보다 섬세했고 성숙했던 그를 시기하던 유치한 일진 무리가 있었다. 처음에는 툭툭 건드리는 힘자랑으로 시작했다고 했다. 별로 대응을 하지 않자 만만하게 보고 상습적인 폭력을 휘둘렀다. 악랄하기가 이를 데 없는 것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티가 나지 않는 부위를 골라 때렸다.


아무도 없는 이른 아침 시간에 등교하도록 협박해서 1년 가까이 상습적인 폭행을 했다. 수많은 돌덩이가 그의 호수에 파문을 일으켰고, 그의 마음은 천천히 가라앉았다. 모든 것을 내가 알게 된 것은, 유원이가 학교를 나오지 않게 된 후였다.


대대적인 전수조사와 폭력자치위원회가 열렸고, 가해자 4인은 따로따로 분리되어 처벌 후 강제전학 조치되었다. 정해진 등하교 시간 이전과 이후의 학교 출입은 금지되었다. 처리결과와 관계없이 몸도 마음도 지친 아이는 계속 장기결석을 했다. 이미 학교는 자신이 살 세계가 아니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기도 하다. 아이는 1년쯤 더 등교하지 않은 채로 있었다. 그리고 자신만의 길을 가기 위해 자퇴를 했다.



2


《다 팔아 마트》라는 제목의 동화책을 읽었다. 첫 번째 단편 '목소리를 샀어'에서는 그동안 하고 싶었던 모든 말을 침묵으로 삼킨 채 버텨야 했던 아이가 등장한다. 그동안 아이에게 말은 별로 필요하지 않은 물건이었다. 아이가 부탁하기 전에 이미 부모님이 필요한 것을 다 채워주었고, 손가락으로 가리키기만 하면 되었다. 목소리가 필요하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상황이 달라졌다.


아이는 일 년에 한 번, 3일간 열리는 다 팔아 마트에서 목소리를 구입한다. 자신을 괴롭히고 무시하던 아이들에게 참고 있던 얘기를, 시장에서 산 목소리로 속 시원하게 전부 말해버린다. 욕설과 험한 단어가 등장하지만, 그야말로 핵 사이다다.


국어 부장님이 <다 팔아 마트>라는 제목의 동화책을 내신 작가님을, 문학강좌의 초청강사로 모셔오셨다. 연수에서 강연을 듣고 너무 좋았다고 하셨다. 나는 깜짝 놀라고 식은땀이 나도록 당황했다.


"작가님이 우리 학교에서 하는 강연을 수락하셨다고요?"

"네. 제가 너무 좋아서 부탁드렸더니 흔쾌히 오신다고 하셨어요. 왜요??"


"부장님 모르세요?"

"뭘요?"


"학년이 달라서 모르셨을 수 있는데, 작가님이 유원이 엄마시잖아요."

"네??? 진짜요? 전 정말 몰랐어요. 직접 오신다고 하셨으니 괜찮지 않을까요?"


"소중한 아이가 힘든 일을 겪은 곳인데, 마음이 그래도 안 좋으시지 않을까요?"

"일단은 오시겠다고 하셨으니 기다려봅시다."



3


완전히 까맣게 잊고 있었다. 내가 쓰려고 하는 책의 목차를 만들고 있었다. 근무했던 학교에서 만났던 아이 중, 유난히 눈에 밟혔던 아이들과의 에피소드를 제목으로 만들었다. 다시 하나씩 보면서 학교와 아이들 이름을 연결 지었다.


책으로 내고 싶은 또 다른 몇 가지의 주제 중에서 학교도서관 사서로서 청소년 도서를 소개하는 책의 목차를 만들기로 했다. 블로그에 적어둔 책 리뷰를 뒤져 십 대들에게 소개해줄 책을 고르던 중이었다. 갑자기 그 동화책이 눈에 띄었다. 순간 유원이의 얼굴과 이름이 팟! 하고 떠올랐다. 리뷰를 써 두었던 내용을 읽어 내려가는데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너무도 미안해서 견디기가 힘들었다.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눈물이 한참을 그치지 않았다. 내가 유원이를 까맣게 잊고 있었구나. 옆에 있는 동안 지켜주지도 못해놓고 또 잊어버렸구나. 나도 별다를 바가 없다. 참 나쁜 인간이다. 또 잊는 일이 없도록 이 기록을 꼭 남겨두어야겠다.


마지막으로 스스로에게 당부한다. 아이들을 대할 때 주의해야 할 점 다섯 가지다. 아이들의 사소한 변화라도 늘 관찰할 것. 내가 보는 모습이 전부가 아닐 수 있음을 기억할 것. 내가 틀릴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할 것. 잔잔한 호수라도 늘 고요하지 않을 수 있다는 걸 잊지 말 것. 내 기준대로 누구도 섣불리 괜찮을 거라고 단정하지 말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