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꼭지의 비밀

흐르지 않은 이유

주방 싱크대의 수도에서 물이 이상하게 나오기 시작한 건 엊그제 밤부터였다. 우리 집 주방 수전은 코브라 헤드 형태로 헤드에는 본래 물 나오는 상태를 조절할 수 있는 버튼이 달려 있다.

이 버튼의 방향에 따라 왼쪽을 누르면 센 물줄기가 중앙으로 모여서 나오고, 오른쪽을 누르면 가는 물줄기가 원형으로 여러 곳에서 나오도록 선택할 수 있게 되어 있다. 근데 아무리 버튼을 눌러봐도 가는 물줄기 몇 가닥과 1/3도 안 되는 양의 중앙 물줄기가 찔끔찔끔 나올 뿐이다.

주방 수도가 이상하다는 걸 확인시켜 주려고 남편을 뷸러 뮬을 트는 순간 타닥 하는 소리와 함께 헤드 아래가 부서지면서 수도 내부가 바깥으로 노출되었다. 물은 이제까지 보다 더 기괴한 형태로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트레비 분수도 아닌데 네 줄기로 갈라져 사방으로 물이 튀기 시작했다. 으악.

황급히 수도를 잠갔지만 이미 사방에 물이 튀어 한참을 닦아내야 했다. 당장 요리를 만들 때 물을 사용하는 것부터 식사 후 설거지와 행주를 빨아야 하는 것까지 큰 불편함을 느끼게 되었다. 언제든 틀기만 하면 주방 싱크대에서 물이 콸콸 쏟아지고, 버튼 하나로 물줄기가 쉽게 바뀌는 것들이 당연한 일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이사 오기 전 첫 신혼집에서 무언가 고장이 나서 고쳐야 할 곳이 생길 때마다 요청드렸던 업체 사장님께 SOS를 보냈다. 주방 수전이 고장 났다는 문자와 함께 수전을 찍은 사진을 보냈다. 사장님은 내일 당장 오실 수 있냐는 물음에 흔쾌히 그러겠다고 대답하셨다.

퇴근 직후, 쏜살같이 집으로 달려와 사장님을 맞이했더니, 잠시 후 주방 수전을 새 걸로 깔끔하게 교체해 주셨다. 물을 틀어보니 언제 그랬냐는 듯이 버튼의 방향을 따라 물줄기는 콸콸 잘도 나왔다. 애초에 물이 안 나왔던 게 아니고 주방 수전이 오래되어 고장 나고 막혀있어서 물줄기가 제대로 흘러나올 수 없었던 거였다.

머리를 세게 한 대 맞은 것처럼 번뜩하는 깨달음이 찾아왔다. 하나님의 은혜가 나를 떠났던 것이 아니고, 통로로 사용되어야 할 내가 고장 나고 막혀있어서 그 은혜가 흐르지 못하고 있었던 거였다. 은혜가 흐르지 못하도록 꽉 막혀있고 고장 나게 만든 주범은 바로 나였다.

고장 나버린 주방 수전을 통해 그분 앞에 제대로 서 있지 못했던 내 모습을 돌아보게 되었다. 한 귀로 듣고 흘려버렸던 찬양이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내 삶에 당연한 것은 하나도 없었고, 이제까지 모든 것이 은혜 오직 은혜였음이 새삼 깨달아졌다. 그렇게 은혜 입은 모든 사실들과 시간들에 대한 감격의 눈물이 다시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하나님께서 친히 찾아와 답답하게 막혀있던 내 삶의 수도꼭지를 뚫어 새로운 마음으로 교체해 주셨다.

이제야 어디로 갈지 몰라 방황하던 마음에 답답함이 해소 되고 조금쯤 후련해진다. 수도꼭지가 다시 꽉 막혀버리지 않도록 그 은혜의 물줄기가 계속 축복의 수도꼭지를 통해 흘러나오도록 정신 차리고 관리해야겠다. 주신 은혜들을 기억하고 계속해서 물이 흐를 수 있도록 나의 수도를 활짝 열어두어야겠다.

여호와께서 너희의 땅에 이른 비, 늦은 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시리니 너희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을 것이요.(신명기 11:14) 적당한 때를 따라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채우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내 삶도 금세 그 은혜의 물줄기로 가득 채워질 수 있을 거다.

"내가 누려왔던 모든 것들이, 내가 지나왔던 모든 시간이, 내가 걸어왔던 모든 순간이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 아침해가 뜨고 저녁에 노을, 봄의 꽃향기와 가을의 열매, 변하는 계절의 모든 순간이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 모든 것이 은혜 은혜 은혜 한없는 은혜. 내 삶에 당연한 건 하나도 없었던 것을. 모든 것이 은혜, 은혜였소.

내가 이 땅에 태어나 사는 것, 어린아이 시절과 지금까지, 숨을 쉬며 살며 꿈을 꾸는 삶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 살며, 주를 찬양하고 예배하는 삶,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축복이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 모든 것이 은혜 은혜 은혜 한없는 은혜. 내 삶에 당연한 건 하나도 없었던 것을. 모든 것이 은혜, 은혜였소.-손경민, 은혜(feat.지선, 이윤화, 하늬, 강찬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