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사람들은 사회가 공정하다고 믿고 싶어 하며, 차별을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사람들의 희망 사항대로라면 아무도 차별받지 않고 모두가 행복하게 각자의 삶을 살아내는 사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차별 당사자 외에는 보이지 않는 구조적인 차별이 수없이 존재한다. 대체 왜 그럴까?
몇 년 전 크게 이슈가 되었던 책이 있다. 바로 ‘선량한 차별주의자’다. 이 책의 주요 내용은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보이지 않게 누군가를 차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럴 의도는 전혀 없을지라도 사소해 보이는 말과 행동을 통해 사실은 누군가를 차별하고 있다는 깨달음은 충격적이었다. 저자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 우리가 얼마나 크고 작은 차별에 노출되어 있는지를 돌아보게 되었다고 한다.
차별에 대해 이야기하면 가장 많이 듣게 되는 말 중 하나가 ‘내가 속한 회사는 안 그래. 그건 너희 회사의 문제야.’ 혹은 ‘이만큼이나 평등해졌는데 뭘 더 바라는 거야. 역차별 아니야?’ 하는 말이다. 예전에는 눈에 보이는 차별이 수두룩했던 것을 생각하면 아주 틀린 말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무서운 것은 보이지 않지만 일상 속에서의 혐오와 차별이 이제 더 교묘하게 우리를 통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국제사회에서는 동양인으로, 한국사회에서는 여성으로, 직장에서는 비정규직으로, 외모로는 아토피가 있고 뚱뚱한 체형을 가진 소수자 집단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해외는 자주 나가지 않아서 동양인에 대한 차별은 많이 안 겪었지만, 한국 사회에서 뚱뚱한 여성이자 비정규직으로 살아오면서 일상에서 세지도 못할 정도로 수많은 차별과 편견, 혐오표현을 심각하게 경험해 왔다.
특히 대중교통을 탈 때 버스나 지하철에서 아무런 이유도 없이 불특정 남성들에게 혐오표현을 들은 적도 수두룩하고 심지어 묻지 마 폭행을 당한 적도 여러 번 있었다. 택시를 타려고 할 때는 첫 손님부터 안경 낀 여자가 타면 하루 종일 재수가 없다며 승차 거부를 당하기 일쑤였다. 역 지하상가를 걸어가는데 앞에서 지나가던 할아버지가 지나가며 갑자기 가슴을 만지는 황당한 성추행을 당한 적도 있다.
직장에서는 정규직이 아니라는 이유로 공식적인 직위나 호칭 대신 개인의 인격을 폄훼하는 발언을 수도 없이 들어야 했다. 최근에는 능력주의의 덫에 걸린 이들로 인해 일방적으로 한 직종을 폄하하거나, 자신들의 분노를 투영하는 집단행동들이 점점 더 많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오죽하면 여성과 여성정책에 대한 혐오를 무기로 삼은 정당이 대선에서 승리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이것이 지금 한국사회의 처참한 현실이다.
차별과 혐오의 본질에는 개인의 힘으로 혹은 특정 집단의 힘으로 해결되지 않는 뿌리 깊은 정치 경제 사회 등 구조적인 문제가 자리하고 있다. 실질적인 문제 해결이 불가능하니까 이러한 구조적 문제를 희석화하고 그 책임을 다른 젠더 집단에 전가함으로써 문제의 본질을 왜곡하고 엉뚱한 방향으로 문제를 회피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편견은 혐오표현을 낳고, 혐오표현을 통해 차별이 심각해지며, 심화된 차별은 폭력과 집단행동까지 야기하게 된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이전보다도 더 치열하고 복잡해졌다. 열심히 노력해도 원하는 직장에 입사할 수 있는 기회 자체가 줄어들고 있다. 또한 4차 산업혁명으로 전반적인 산업의 구조가 바뀌는 과도기에서 수많은 혼란을 겪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야말로 한 치 앞을 모르는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 끊임없고 지속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구조적인 문제들로 인해 기대하던 삶에 실패하고 좌절을 겪으며 쌓여온 분노가 자신보다 약한 개인이나 집단에 전가되어 점점 더 차별과 혐오가 심해지고 집단 이기주의가 팽배해지는 것이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타인을 향한 혐오와 차별을 쏟아내는 것은 이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근본적인 문제 해결 방법은 오히려 편견을 해소하는 것이다. 우리 안에 알게 모르게 잠재되어 있는 편견을 해소해야 혐오와 차별도 중단될 수 있다. 점점 불안해지는 사회에서 마음속에 갖고 있던 불안감이 혐오표현이 되어 특정 집단이나 젠더를 향해 스멀스멀 나오기 시작하면, 사회의 올바른 구성원으로서 그것이 잘못된 방향임을 깨우쳐 주고 경고해야 한다.
누구나 자신이 당하는 차별에는 민감하지만 스스로 누리는 특권에 대해서는 둔감할 때가 있다. 나 역시 직장이나 젠더 영역에서는 소수 집단에 속하지만, 종교와 신체적 자유, 결혼 여부 등에서는 특권을 가진 사람이기도 하다. 평등은 언제나 부당한 법과 체제에 항거하는 사람들을 통해 진보해왔다. 진짜 차별과 혐오를 없애기 위해서는 내가 서 있는 곳은 어디인지, 나는 어떤 땅 위에 서 있는지, 내가 가진 특권을 너무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는지 고민해 보아야 한다.
우리를 일깨워 주고 돌아보게 하는 ‘선량한 차별주의자’ 속의 문장으로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나는 어디에 서서 어떤 풍경을 보고 있는가. 내가 서 있는 땅은 기울어져 있는가 아니면 평평한가. 기울어져 있다면 나의 위치는 어디쯤인가. 이 풍경 전체를 보려면 세상에서 한 발짝 밖으로 나와야 한다. 그럴 수 없다면 이 세계가 어떻게 기울어져 있는지 알기 위해 나와 다른 자리에 서 있는 사람과 대화해 보아야 한다.
새장을 가까이에서 보면 철망이 한 줄씩 보인다. 철망은 하나씩 보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 얇은 선 하나가 새의 비행을 방해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새장에서 뒤로 물러서서 바라보아야만 그 철망들이 모여 새장을 이루고 있으며 이 새장이 새를 가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우리를 가두고 있는 새장도 뒤로 물러나야 볼 수 있다.
차별은 생각보다 흔하고 일상적이다. 고정관념을 갖기도 다른 집단에 적대감을 갖기도 너무 쉽다. 내가 차별하지 않을 가능성은 사실 거의 없다. 세상은 정말 평등한가? 내 삶은 정말 차별과 상관없는가? 시야를 확장하기 위한 성찰은 모든 사람에게 필요하다. 모든 일이 그러하듯 평등도 저절로 오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