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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임 당하지 않을 권리

by Pearl K

우리가 매일 이용하는 평범한 지하철역 화장실에서 또다시 한 여성이 한 남성에 의해 묻지 마 살인을 당했다. 피해자는 역무원이었다. 자신의 근무지인 지하철역에서 여자 화장실에 그녀를 따라 들어온 30대의 남성에 의해 흉기로 찔려 병원으로 이송되었고 생명을 건지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심정지로 사망했다.


사회초년생인 20대의 평범한 한 여성에게 근무 중인 평범한 하루였을 저녁 아홉 시였다. 공공기관에 입사했다며 부모님도 기뻐하시고, 주변에서도 많은 축하를 받았을 전도유망한 청년이었다. 그 시간에 근무를 마무리하는 중이었을지도 모른다. 단지 화장실에 순찰하러 들렀을 뿐인데 가장 익숙하던 직장이라는 일상의 공간은 낯선 공포의 장소로 변했다. 누가 그녀를 왜 죽인 것일까.

희한하게도 기사에는 피해자를 특정할 수 있는 정보는 가득한데, 가해자를 특정할 수 있는 정보는 없다. 가해를 저지른 그가 30대의 남성이라는 것뿐이다. 그가 도대체 누구인지, 무슨 일을 하는지, 왜 한 사람을 살해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피해자와 유가족을 위해서 최소한의 예의조차 지키지 않는다. 2016년 5월 강남역 살인사건이 일어났던 그때도 그랬다. 피해자의 정보는 기사마다 넘쳐났지만 가해자에 관한 정보는 너무도 희박했다. 남자 친구와 데이트를 하러 나왔던 한 여성은 화장실에서 여성만 골라 살해한 범인에 의해 본인의 의지와 관계없이 그 생을 끝내야만 했다.


황당한 건 결국 수많은 노력들에도 불구하고 강남역 살인사건은 여성을 향한 증오범죄로 인정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불특정 다수를 향한 무차별적인 묻지 마 살인이라고 했지만, 팩트만 따져보아도 강남역 사건의 범인은 여성 피해자가 들어오기 이전에 다섯 명의 남성을 돌려보낼 정도로 인내심이 있었다. 그렇게 유야무야 되는 사이 6년 후 또 지하철역에서 일부러 여자 화장실까지 따라 들어간 가해자는 평범한 사회초년생이던 20대 여성을 흉기로 찔렀고 사망에 이르게 했다.

잔혹한 범죄로 생명을 잃은 한 사회초년생을 애도하기에도 모자랄 텐데, 해당 기사 아래에 그러니까 여자도 군대를 가야 한다며, 여자들이 군대를 안 가서 자기 방어 능력이 부족해서 벌어지는 일이라는 황당한 댓글이 적혀 있는 것을 보고 답답하고 암담해졌다. 심지어 정치에서조차도 적극적으로 여혐을 부추겨 표를 얻고 당선되는 전략을 사용했던 것을 보면 이 사회가 차별과 혐오에 대해 어찌나 무지하고 무례한지, 편 가르기와 계층 나누기를 이용해 평범한 이들을 속이고 자신들의 이득만 취하는지 부끄럽기 짝이 없다.

각종 가정폭력과 데이트 폭력, 묻지 마 범죄로 살해당하는 여성의 이야기가 1년 365일 중에 최소한 300일 이상 사회면을 도배하고 있는 지경인데도, 여성에 대한 증오범죄는 없다고 단언할 수 있는 것인지 다시 한번 묻고 싶다. 지극히 평범한 내 삶에서도 20여 년 전 이미 강남역에서 묻지 마 폭행을 당했었고, 지하철 안에서 여러 차례의 주취 폭력을 경험했다. 게다가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마다 전혀 일면식도 없는 남성들이 대놓고 쏟아내는 혐오 표현을 수시로 당했다. 이런 사회에서 여성으로서 아직은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걸 기적이라고 봐야 하는 걸까.

김지혜 작가의 책 '선량한 차별주의자'에 따르면 차별은 하는 사람은 인지하지 못하고 당하는 사람만 인지한다고 한다. 보이지 않는다고 차별을 외면하고 혐오표현과 편견을 부추기는 사이에 가장 안전해야 할 공간인 일상이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위험한 공간으로 탈바꿈되었다. 사회구조적 변화로 생겨나는 상대적 박탈감을 소수 집단에게 풀어내는 것이 바로 차별이고 혐오이다. 계속해서 이 사실을 외면한다면 대한민국은 그 어느 집단에게도, 그 누구에게도 안전한 나라일 수 없다.

내가 태어나고 자라고 삶을 만들어가고 있는 이 나라가 제발 모두에게 안전한 나라가 되면 좋겠다. 불시에 벌어지는 불특정 다수에 의한 폭력의 위협과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지 않고 싶다. 매일 안전하게 주어진 만큼의 삶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다면 좋겠다. 이 나라에서 살아가는 모두 남성과 여성, 다문화, 외국인, 장애인, 소수자, 사회적 약자까지 그게 누구이든 간에 우리에겐 함부로 죽임 당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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