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순이와 가장 거리가 먼 사람을 고르라면 그건 아마 나일 것이다. 집에 있는 걸 싫어하진 않지만 휴일에 하루 종일 집에 있는 것보다는 바깥에 나가 무언가를 하거나 누군가를 만나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 훨씬 즐겁다.
보통 나의 삶이란 매일의 약속과 일정이 빽빽하게 짜여 있는 날들이 대부분이었다. 하루를 48시간처럼 직장과 교회, 개인일정과 약속까지 네다섯 가지를 한 번에 소화해 내며 꽉 채워 살았다. 그런 나날들이 당연했고 체력적으로 무리가 된다 싶으면 몇 달에 하루 정도 날을 잡아 아무것도 하지 않고 푹 쉬고 나면 금세 회복되었다.
결혼과 동시에 이사를 하고 삶의 기반이 달라지면서 친한 친구들도 각자의 가정이 생기고, 사는 지역이 멀어지면서 자주 만나기가 힘들어졌다. 부부로서 새로 옮긴 교회 공동체에서도 그랬다. 주말을 온전히 내어 주고도 늘 바쁘던 청년부 공동체에서와는 달리 장년부의 일정은 너무 느긋해서 오히려 적응이 잘 안 되었다.
고마운 분들의 도움으로 겨우 적응을 했을 무렵, 코로나가 터졌고 금방 잦아들 줄 알았는데, 상황이 점점 더 심각해져서 아무도 만날 수 없고, 어디에도 자유롭게 돌아다니기 힘든 환경이 주어지게 되었다. 세상에 혼자 갇힌 것처럼 너무 답답하고 숨이 막혀서 괴로웠다. 그런 갑갑합을 풀기 위해 시작했던 두 가지가 무작정 한강이 보이는 곳이나 넓은 공원길을 찾아가서 걷는 것과 온라인 글쓰기 모임에 도전하는 것이었다.
나중에는 이 두 가지가 하나로 합쳐졌다. 무작정 집밖으로 나가서 길을 걸으면서 글감을 생각하고, 휴대폰으로 글을 쓰면서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걸었다. 탁 트인 공간을 걷고 있으면 청량한 공기에 머리가 맑아져서 잘 생각나지 않던 글감들도 잘 떠올랐다. 글감들이 떠오르면 발걸음을 멈추고 글을 쓰느라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가 다섯 번씩 바뀌는 동안 움직이지도 않고 제자리를 지켰다. 그땐 내 발길이 닿고 걸어갈 수 있는 모든 길과 모든 거리가 나만의 글쓰기 아지트였다.
운전에 익숙해진 후로는 가끔 혼자서 차를 몰고 훌쩍 짧은 여행을 떠난다. 노트북 하나를 챙겨 차로만 닿을 수 있는 도로 한가운데의 어느 지점에 있는 카페로 향한다. 그런 곳엔 사람들은 많지 않아서 막힘 없이 광활한 바깥 풍경을 바라볼 수 있어 참 좋다. 콜드브루 한 잔을 주문하고 창밖이 잘 보이는 자리에 앉아 노트북을 연결하고는 한동안 풍경에 취해 멍을 때린다.
복잡한 머리를 깨끗이 비워내고 나면 무엇을 어떻게 써야 할지 선명하게 정리가 되는 느낌이다. 물론 실제로 써내는 글은 나의 기대보다는 명확하지 않을 때도 있지만, 적어도 나를 괴롭히던 고민들은 해소가 되는 것 같다. 다리부상으로 허리와 다리가 아파 한동안 짧은 거리조차 걷기 힘들었을 때는 이 방법을 자주 사용했다. 덕분에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고요한 혼자만의 공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나는 외향형이지만 외향형 중에서는 내향형에 가장 가까운 나만의 공간이 꼭 필요한 사람이다. 당시엔 나조차 정확히 몰랐지만, 내 성향에 잘 맞는 곳들을 놀랍게도 본능적으로 찾아냈던 것 같다. 바쁘게 돌아가는 도시 속에서 사람들이 사라진 텅 빈 거리를 걸으며, 통창이 커다랗고 뷰가 좋은 한적한 카페에서 마음껏 바라볼 수 있는 풍경과 사람들의 소곤대는 소리, 집중할 수 있는 환경 모두를 충족시키며 나의 필요를 채울 수 있었다.
살아있는 한 계속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살고 싶기 때문에 나의 아지트는 앞으로도 이 두 가지가 모두 만족되는 공간을 선택하게 될 것 같다. 제주도나 풍경 좋은 산 근처에 작가들의 작업실이 그리도 많은 이유를 이제야 좀 알 것 같다. 꿈이 있다면 제주 바다 근처에 통창이 넓은 아지트를 지어 그곳에서 몇 년쯤 글도 쓰고 더운 날엔 바다에 뛰어들어 수영도 하고, 천연식재료로 요리도 하고 건강하게 자연스럽고 여유롭게 살고 싶다.
"꿈을 그리는 사람은 그 꿈을 닮아간다"라고 했다. 지금부터라도 나의 꿈의 아지트를, 그 공간을 풍경을 머릿속으로 그려보며, 차근차근 구체적으로 한 단계씩 계획을 세워 나가야겠다. 자꾸 그리다 보면 언젠가 만들어질 나만의 외향내향형의 아지트를 위해서 말이다. 자 그럼, 이제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줄 차례다. 당신만의 아지트는 어디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