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이야기가 꼭 거대해야만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세상에는 거대한 이야기가 있으면 소소한 이야기도 있고, 한 중간 정도 되는 사이즈의 이야기도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병 안에 돌을 가득 넣는다고 생각했을 때 작은 돌과 큰 돌을 고루 넣고 마지막에는 작은 알갱이를 가진 모래들도 뿌려주어야 빈틈없이 가득 차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내 관점에서는 소소하지만 귀여운 이야기 정도로 기분 좋게 볼 수 있던 작품이었다. 안타깝게도 다른 사람들의 생각은 전혀 다른 것 같지만. 며칠 전 개봉한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 페이즈 5의 세 번째 작품 ‘더 마블스’에 관한 감상이다.
우리 부부로 말할 것 같으면 유서 깊은 마블 작품 마니아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페이즈 1,2에 해당하는 작품들은 우리가 만나기 전이어서 각각 따로 관람했다. 연애 시절 페이즈 2의 마지막 작품인 앤트맨 1편부터 시작해서 올해를 마무리하는 페이즈 5 중반까지의 영화와 드라마를 통틀어 그야말로 모든 작품을 함께 보았다.
마블이 달라졌다는 이야기는 페이즈 4가 시작된 이후부터 심심찮게 나왔지만, 가장 큰 축이라고 할 수 있던 케빈 파이기 감독이 DC 쪽의 작품들을 작업하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삐걱거리고 있는 상황이다. '어벤저스 앤드게임' 이후 거의 모든 작품이 그닥 좋지 않은 반응을 얻고 있으니 마블과 디즈니 입장에서도 죽을 맛일 것 같다.
올해 개봉했던 ‘앤트맨과 와스프: 퀀텀매니아’도 살짝 아쉬움이 있었고, 그나마 케빈 파이기 감독이 유종의 미를 제대로 보여준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volume 3’는 많은 관객들에게 예전 마블의 느낌과 향수를 전해주기도 했다. 아마도 그래서 이번 작품에 대해 기대 반, 걱정 반으로 기다렸을 마블 팬들은 더욱 실망하는 말을 쏟아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더 마블스’는 꽤나 불친절한 작품이다. 이 작품을 보기 전에 꼭 보아야 할 디즈니플러스의 마블 드라마 시리즈들이 있기 때문이다. 만일 아무런 사전정보 없이 ‘더 마블스’만을 보러 영화관에 간다면 꽤나 진입장벽이 높은 작품이 될 수밖에 없다. 영화 ‘더 마블스’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영화 ‘캡틴 마블’, ‘토르: 라그나로크’와 드라마 ‘완다 비전’, ‘미즈 마블’, ‘호크아이’를 먼저 관람해야 한다.
‘더 마블스’는 페이즈 1부터 등장한 거의 유일한 여성 히어로였던 블랙위도우 사망 후, 새로운 여성 히어로들의 집단 서사를 써나간다는 점에서는 꽤 의미 있기도 하다. 이번 더 마블스에는 캡틴 마블인 캐럴 댄버스, 미즈 마블 카말라 칸, 모니카 램보만 등장했을 뿐이다. 깜짝 등장한 아스가르드의 새 통치자 발키리와 쿠키에서 짧게 모습을 드러낸 케이트 비숍도 반가웠다.
이외에도 앤트맨의 딸 캐시 랭, 디즈니플러스 오리지널 시리즈의 쉬헐크, 닥터 스트레인지 2에 등장한 멀티버스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소녀 아메리카 차베즈까지 다양한 가능성을 지닌 차기 히어로 후보들이 잔뜩 남아 있어 앞으로 어떻게 자라날지 또 MCU에는 어떤 영향들을 미치게 될지 궁금하게 만든다. 또 더 마블스가 끝난 후 나오는 두 번째 쿠키에는 디즈니가 엑스맨을 만나며 확장되는 세계관이 등장할 것을 예고하고 있다. 덕분에 엑스맨 찐 팬인 나에게는 설레는 기다림이 될 것 같다.
‘더 마블스’에서 한국 관객들이 가장 주목할 것 중 하나는 바로 배우 박서준의 등장이다. 국내에서는 주로 잘생기고 건실한 청년, 사장 등을 연기해 온 박서준은 그간 한국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전혀 보여주지 않았던 새로운 모습으로 등장하여 놀라움을 주었다. 게다가 박서준과 캡틴 마블의 예상하지 못했던 특별한 관계까지 밝혀져 더욱더 충격적이었다. 다행히 박서준 캐릭터는 크리족의 공격에도 죽지 않은 듯하니 언젠가의 작품에서 다시 반갑게 등장해 줄 날을 기대해 본다.
처음에는 지구에서 시작된 소소한 이야기는 지구를 넘어 범우주적 스케일로 확장되었다. 우주마저도 넘어 평행우주와 멀티버스까지 넘나들던 스토리는 화려했다. 멋진 CG와 최첨단 장비들이 눈을 뗄 수 없게 만들던 작품들이 가득했는데, 이번 더 마블스도 우주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뭔가 소소해진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오래된 팬들 사이에서 실망과 우려의 목소리들이 나오고 있는 것은 분명 새겨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관객 역시도 마블이 들려줄 새로운 세대의 이야기가 다시 성장해 나갈 수 있도록 조금만 참고 기다려 주길 바라는 것은 욕심일까? 모두를 만족시킬 순 없겠지만 마블 역시도 관객들의 의견을 반영하여 최근의 반감된 재미를 보완하고 작품 부진을 뚫고 나갈 방안을 마련해 주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