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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트우먼 Feb 10. 2022

3. 내 인생의 두 번째 아이

웩슬러 검사를 받다.



올인하지 못한 이유


 H와 하루하루를 성실히, 그리도 감사하게 지냈지만 H가 가진 약간의 특별함과 선생님의 피드백에 발 빠르게 반응하지 못한 이유가 있었다. H가 3살 때 주변에서 동생에 대해 계획이 있냐고 많이 물어봐 주셨고, 그때마다 뚜렷한 결정을 하지 못했지만 이렇게 H 하나만 잘 올인해서 키우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그러면 또 주변에서는 '나중에 H가 외로울 것이다. 엄마한텐 딸이 있어야 한다' 등 진심 어린 걱정들을 해주셨지만, 둘째가 생긴 들 딸이라는 보장도 없을뿐더러, 마냥 이쁜 H에게 내 사랑을 다 주고 싶었고 나도 다시 힘들게 출산의 과정을 겪고 싶지 않았다. 몸을 편히 놔두게 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점점 기우는 나의 마음을 비웃기라도 하듯 둘째 소식이 찾아왔다. 잠시 친정 엄마께서 어떤 일로 우리 집에 며칠 와계셨고, 오랜만에 엄마의 음식을 과식해서 그런지 소화가 잘 되지 않았다. 엄마가 가신 뒤에도 증상이 계속되어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임신 테스트기를 사용했고 아뿔싸! 두줄이 나왔다.


 그렇게 나는 다시 임신 기간을 보내야 했지만 H를 임신했을 때와는 너무나 다른 환경이었다. 그때는 남편과 주말 부부라서 밥을 의무적으로 해줘야 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리고 밑에 층에는 시부모님 댁이 있었고 길 건너에는 친정 부모님이 댁이 있었기에 직접 밥을 챙겨 먹은 날이 거의 없었다. 또 첫 임신이라서 부모님들께서 이것저것 챙겨주시고 마음 써주셔서 매일 누워서 좋아하는 노래를 듣다가 이것저것 만들기도 하다가 친구도 만났다가 하는 베짱이 같은 생활이었다.


 하지만 둘째를 임신했던 시기에는 퇴근하는 남편 저녁도 챙겨줘야 하고 H도 돌봐야 했다. 또 동생이 생긴 것을 어떻게 아는지 당시 H의 미운 행동들도 많아졌고 유독 엄마만 찾는 날도 많아졌다.    잠깐이라도 부모님의 도움을 받고 엄마의 맛있는 음식도 먹고 싶었지만 멀리 계신 부모님께 어리광 조차도 피우지 못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H때에는 임신 초기에 잠깐 지나갔던 입덧이 이번에는 꽤 오래, 그리고 심하게 지속이 되었다. 구토도 많이 했고 잘 먹지도 못했다. 남편도 당시 직장 문제로 힘들어해서 남편에게 투정을 부릴 수도 없었고, 임신 기간의 호르몬 변화도 있어서 남편에게 짜증도 많이 내게 되었다. 마음이 편할 수 없는 환경이었다.


 이러한 시기에 H의 특별함을 계속 반응해주고 관심을 가져주기가 어려웠다. 아무 일 없이 먹고 잘 수 있음에 감사해야 했다.




엄마의 민낯이 드러나다


 10달의 임신 기간이 지나 둘째가 태어났다. 두 번째 출산이라서 어렵지 않게 속전속결로 출산이 진행이 되었다. 다행히 어여쁜 공주님이 태어났고, H도 크게 질투를 하거나 거부하는 반응은 없었다.

 하지만 출생 2주 후부터 둘째의 예민함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일명 등 센서. H때는 경험하지 못했던, 말로만 듣던 등 센서였다! 울음소리도 어찌나 큰지! 이렇게 작은 체구에서 이런 목청소리가 나다니! 우연히 봤던 육아서에서는 아기가 처음에 운다고 자꾸 안아주면 계속 안아주게 되어 육아가 힘들어진다고 했다. 하지만 안아줄 때까지 울어대는 아기 앞에서 그 울음소리를 외면하기가 어려웠다. 안아주면 언제 울었다는 듯 평화롭게 잠이 들었다.


 그러다가도 눕히면 바로바로 깨어나는 둘째의 신기하고도 이해하기 힘든 감각 때문에 밤을 지새워가며 잠든 아기를 안은 채로 선잠을 자는 날이 많아졌다. 점점 내 신경도 예민해져 갔다. 자연스럽게 H는 아빠가 담당하게 되었다. 아빠가 퇴근하기까지 거의 방치가 되었고 놀다가 큰 소리라도 내면 둘째가 깰까 봐 다그치는 일도 많아졌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후회스럽다.


 두 아이의 육아가 시작되면서 인내심이 많으면 많다던 나도 점점 나의 한계를 마주 보게 되었다. 나의 밑바닥이 드러나는 날은 벌거 선채로 서있는 기분이 들었다. 울기도 많이 울었고 잠깐의 외출도 어려워 스트레스를 풀 곳도 마땅치 않았다.

 그렇게 1년이 지났다. 둘째의 첫 돌을 맞이하며 약간의 평화가 찾아온 듯했다. 하지만 안아주는 것이 습관이 돼버려 잠깐이라도 나가야 할 때는 유모차에 태우기보다 아기띠로 안아줘야 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둘째는 그 당시 몸무게가 상위 99.9% 우량아라서 그 무게는 오롯이 내 몸이 감당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검사를 하게 되다.


 이렇게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피폐해져 갔지만 크게 동생을 질투하지 않고 야무지게 어린이집을 다니는 H가 고마웠다. 마음을 어렵게 하는 둘째를 키우니 상대적으로 엄마를 편하게 해 준 H에게 그런 마음이 더 커진 것 같다. 예민한 둘째이지만 가끔 딸 키우는 재미를 느끼게 해주는 포인트는 건조한 사막에서 마시는 물 한잔 같았다.

 이렇게 하루하루 다양한 감정이 오가는 가운데 H는 어린이집을 졸업했고, 원장 선생님께서 지능 검사라는 큰 숙제를 안겨주셨지만 나는 바로 반응하지 못했다. 아니, 그럴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H는 새로운 유치원으로 진급했고 어린이집과는 차원이 다른 다양한 활동들로 매일 즐거워 보였다. 역시 긍정적인 아이였다.


 그러다 몇 달이 지났고, 나는 지역 육아종합지원센터에 아이들 책을 빌리러 갔다가 우연히 안내문을 보게 되었다. 아이들 지능이나 언어 발달 검사 신청에 대한 안내문이었다. 그걸 본 순간 아! 하고, H가 이 전에 다녔던 어린이집 원장 선생님께서 H의 지능 검사를 권유하셨던 일이 생각났다. 그 당시 나도 검사에 대한 정보를 얻고자 인터넷 검색을 해봤지만 어디서 어떻게 하는지 자세히 찾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몇 년 전 이사 온 이 지역이 아직 낯설기도 해서 새로운 장소를 찾아갈 엄두도 나지 않았다. 아마 둘째의 육아로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것 같다. 그냥 '인연이 아니겠거니, 한다고 뭐가 달라질까'라는 마음들로 잊고 지내게 되었다.

 벽에 걸려있는 안내문에는 발달이 느린 아이들이 주대상이라고 나왔지만 알아보니 그렇지 않아도 신청할 수 있다고 해서 몇 번의 생각 끝에 신청했다. '그래 경험 삼아해 보자. 기회가 흔치 않을 거야'라는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신청한 지능검사 이름은 웩슬러 지능검사였다. 


 검사 당일이 되어 아이와 함께 검사실로 들어갔다. 아이를 낳고 처음 경험하는 상황이라 조금 긴장도 되었다. 그리고 역시나 내 몸과 한 몸이 된 둘째도 같이 데리고 갔다. 어느 순간에 둘째의 울음이 터질지 몰라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들어갔다. 검사가 시작됐고 엄마는 바로 옆 대기실에서 진행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지만 둘째의 칭얼거림이 시작돼 검사에 방해가 될까 봐 밖으로 나갔다. 어떻게든 아이를 재워 보려고 건물 몇 바퀴를 돌았다. 그렇게 긴 시간이 지나고 드디어 검사가 끝났다. H에게도 만 4세가 겪기엔 낯선 경험이었을 텐데 검사실에서 나오는 얼굴에는 미소가 있어서 내심 안도감을 느꼈다. 마치 "엄마 재미있었어요!"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나는 결과 상담 날짜를 예약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드디어 결과 상담 날이 되었다. 상담할 때 엄마 혼자만 가야 해서 H는 유치원에 보내고 엄마 껌딱지인 둘째는 같은 상담 건물의 1층, 시간제 보육실에 잠깐 맡겼다. 엄마와의 헤어짐에 역시 자지러지게 울었지만 나에겐 상담 결과가 먼저였기에 단호한 마음으로 상담실로 들어갔다. 미소를 지으며 기다리고 계신 상담 선생님과 인사를 하고 상담을 시작했다. 그런데 상담 결과는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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