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가 끝나갈 무렵 낯선 여성이 내 이름을 부르며 수줍게 인사를 건넸다. 나는 고개를 들어 잠시 머릿속을 뒤적이다 그 짧은 시간에 간신히 누군지 기억해 냈다. 몇 해 전 서로 호감이 있었으나 깊은 관계로 발전하지 못했던 사람이었다. 세상이 워낙 넓기에 흘러간 인연과 다시 만난다는 건 여간 쉽지 않은 일인데, 주변인들과 대화를 나눠보면 유독 나만 이런 경험이 자주 있다. 지난여름 하루는 오전에 여의도에 갔다가 워싱턴에서 살고 있는 전 여자친구를 마주쳤고, 오후에는 안국동에 갔다가 도쿄에 살고 있는 전 여자친구를 마주친 경험도 있었다. 그래서 이제는 이런 일이 놀랍지도 않다.
우리는 가벼운 인사를 나누고, 여기는 어떤 일로 방문했는지 형식적인 안부를 주고받았다. 그녀의 표정에서 가슴 안에 머금은 말들이 많아 보였다. 나는 의자를 살짝 당기면서 괜찮다면 잠시 내 테이블에 앉으라고 권했다. 그렇게 뜻밖의 장소에서 갑자기 과거사 복기가 시작됐다. 자리에 앉은 그녀는 손을 어디에 둬야 할지 고민하다 글라스 베이스의 가장자리에 가져가더니 천천히 나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말투는 매우 조심스러웠고, 손짓은 작았다.
흘러간 시간들을 중구난방으로 휘젓다 점차 우리가 가까웠던 시점으로 몰입하던 그녀는 과거 나에게 경계심이 들었던 이유들에 대하여 설명했다. 친절은 늘 대가를 요구한다고 배워왔기에 목적 없이 잘해주는 사람은 없다고 믿어왔는데, 당시 내가 한결같이 잘해주니까 과분하다 느낀 바,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함이 들어 자꾸만 마음이 뒤로 물러섰음을 고백했다. 나는 과거의 기억들과 맞물리도록 그녀의 말을 경청하면서 가만히 주워 담기만을 반복했다. 그렇게 케케묵은 감정을 한참 쏟아내던 그녀가 말을 멈추자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녀의 시선은 나의 눈에서부터 어깨를 지나 커트러리를 쥔 손까지 사선으로 떨어지다가 다시 눈으로 돌아왔다.
“그때 왜 그렇게 저한테 잘해주셨어요?” 그녀는 눈물이라도 쏟아낼 것처럼 눈망울을 반짝이면서 의미가 없는 표현을 질문처럼 놓았다. 내가 무슨 말이라도 해주기를 바란 것처럼. 모든 것은 호감에서 비롯된 선의였고, 그때는 소중한 인연이라 느꼈으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겠지. 이제는 감정이 없고, 기억도 흐릿한 사람에게 무슨 말을 줘야 할지 난감했다. 그래서 아무 말 없이 그녀의 눈을 바라봤다.
“시간이 흘러 다시 생각해 보니 정말 좋은 분이셨는데 그땐 제가 겁이 많아 괜한 오해를 했어요. 언젠가 다시 만나면 꼭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오늘이 그 기회인 것 같아요. 혹시 다음 일정이 없다면 저랑 술 한잔해요.” 그녀는 윗니가 살짝 드러나도록 입꼬리를 올려 싱그럽게 미소를 지었다. 수줍음이 많고 내성적이던 사람으로 기억하는데 어떤 세월의 풍파가 그녀를 이토록 능동형 인간으로 변화시켰는지 궁금했지만, 고개를 저으며 웃음으로 거절했다. 그럼 다시 연락을 드려도 괜찮냐는 물음에 이번에도 거절했다. 입술을 깨물며 시선을 맞춰 감정을 전하려는 그녀의 눈빛에서 쉽게 물러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살다 보면 그리웠던 사람을 다시 만나기도 하고 묵은 감정이나 아쉬웠던 일들을 이렇게 해소할 기회가 생겨요. 신기하죠. 다시 만나서 반갑고, 그동안 속에 담아둔 이야기를 오늘 이렇게 솔직히 말해줘서 고맙지만, 요즘 준비하는 일들이 있어서 누군가와 관계를 이어갈 여유가 없어요.” 나는 민망해하면서도 쉽게 자리를 뜨지 못하고 머뭇거리던 그녀에게 한계를 설정하기 위하여 설명을 덧붙였고, 그제야 아쉽다면서 체념한 듯 가방을 챙기는 그녀의 옆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아쉬움이 많은 사람은 말을 하나 더 찾기 마련이다. 기회가 된다면 한국에서 다시 만나고 싶다고 말하며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배웅을 위해 일어나 “기회가 된다면.”이라는 짧은 말로 굿바이를 나눴다. 느린 종종걸음으로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에서 위태롭게 흔들리는 하이힐과 앙상한 발목을 보니 잠시 내 마음도 흔들렸다. 그러나 한 번 어긋난 인연은 어떠한 경우라도 절대 다신 돌아보지 않는다. 늘 그랬듯이.
글, 사진: Pecad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