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모든 사람마다 인생의 방향, 속도, 그리고 관성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여기서 방향이란 자신이 설정한 목표이자 목적지이며, 속도는 그 목표를 향해 개인이 낼 수 있는 최대한의 퍼포먼스이며, 관성은 어디로 흘러가게 되는 과정과 그에 따른 추진력에 의미를 두는 것이다.
강물 위에 떠 있는 나무토막 하나를 떠올려보자. 그 나무토막은 강물을 따라서 흘러가는 동안 목적지가 어디일지 고민하지 않는다. 그저 물길 위를 여행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어느 뭍에 닿는 순간, 나무토막의 여정은 멈춰지고, 그때부터 나무토막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잔해가 된다. 이처럼 정처 없이 떠돌던 나무토막이 뭍에 닿는 순간, 성공과 실패가 명확히 정리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가 과연 나무토막의 의지였을까. 아니면 나무토막을 떠받친 강물의 의도였을까. 혹은 물살을 일으킨 지형이나 바람의 의도였을까. 아니면 비를 내려 물길을 내어준 하늘의 의도였을까.
우리의 인생도 다르지 않다. 우리는 태초에 주어진 자연과 시간이라는 절대 조건 속에서 아직 보잘것없는 맨 몸뚱이에 열정, 희망, 가능성, 재능이라는 작은 나무토막들을 모으고 덧대어 뗏목을 만들어 나간다. 이 뗏목은 나무토막에 비해 부력이 강해서 강물에 쉽게 잠기지 않을뿐더러, 부심(浮心)을 잡기도 용이해서 쉽게 전복되지도 않는다. 또한 이 보잘것없는 뗏목에 돛을 달면 바람이라는 기회를 잡아 방향과 속도를 조절할 수 있는 돛단배가 된다. 그렇게 흘러가다 보면 언젠가 강을 벗어나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망망대해까지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이쯤에서 자문해야 한다. 나는 목표가 중요한가, 아니면 나를 끊임없이 움직이게 만드는 관성이 중요한가. 인생은 과학의 힘을 빌려 완벽하게 예측할 수도 없고, 온갖 변수에 휘둘려 휘청이는 삶에 있어 무엇이 더 중요한지 택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모호한 물음이라는 걸 안다. 그럼에도 길을 잃지 않으려면, 이런 자문자답을 통해 지나온 삶을 돌아보며 스스로를 복기(復棋)하는 수밖에 없다.
나는 인생의 목표보다는 현재의 나를 움직이게 만드는 힘, 즉 삶에 작용하는 관성에 더 주목한다. 돛단배의 키를 잡고 바람의 방향을 읽으며 항해할 때면 자주 뒤를 돌아보는데, 긴 꼬리처럼 늘어진 포말(泡沫)을 바라보면 내가 지나온 여정의 흔적이자, 계속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밀어주는 관성처럼 느껴진다.
나는 언젠가 닿게 될 뭍이 거대한 대륙이길 바라지 않는다. 또한 그곳에 빨리 도달하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이 여정이 가능한 오래 지속되기를, 내내 흥미롭기를 기대할 뿐이다. 그리고 최후의 그날, 마지막 순간까지 나를 움직이게 만들 수많은 관성들이 여전히 내 삶 속에서 존재하기를 바랄 뿐이다.
사진, 글: Pecado